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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최동열(60)은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다. 그림 공부를 해본 적 없는 그는 어느 날 돌아보니 화가가 되어 있었고, 어 느 날 돌아보니 뉴욕에서 주목을 받고 있었다. 미국에서 뜬 그는 ‘한 국의 고갱’이란 별명까지 얻으며 화려하게 국내로 데뷔한다. 월남전 에 참전하고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성공한 그의 스토리는 한편 의 영화와도 같았다. 국내 유명 미술관과 재벌가에서 그의 그림을 사 들이기 바빴고 전시회는 연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흐른 지난 11월. 대구 인당박물관에서의 초대 전을 위해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났다. 강렬하고 열정적인 그림으로 주 목받은 본능파 화가이지만, 초승달 같은 눈매와 서글서글한 웃음이 너무나 매력적인 노신사였다. 하지만 그 눈매에는 젊은 시절의 자유 분방한 기질이 여전히 남아 꿈틀거리는 듯 했다. 그가 그림을 배운 적이 없는 것은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화가가 될 생각이 없었으니 그림을 배울 필요가 없었다. 1951 년 서울 인사동의 99칸 한옥에서 태어난 그의 할머니는 ‘벙어리 삼룡 이’의 작가 나도향의 누님으로 3대가 의사집안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소파 최진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을 대표하는 변호사였다. 일 제의 간섭에도 사재를 털어 한국최초의 법학연구단체인 법학협회를 결성했고 3·1운동 민족대표 48인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경기중에 입학할 만큼 영특했던 최동열 화백은 그의 롤모델로 이승 만 박사를 삼았다. 경기고, 서울대, 프리스턴대를 졸업한 뒤 대통령 이 되겠다고 생각했던 그의 큰 꿈은 경기고 진학에 실패하면서 좌절 된다. 스스로를 안하무인이라고 밝히는 그의 자존심에 재수란 있을 수 없었나 보다. 검정고시를 치러 15세에 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 학 과에 진학한 그는 또다시 막무가내 같은 선택을 한다. 고생을 좀 해 보고 싶다는 이유로 곱게만 큰 도련님이 해병대에 덜컥 지원을 해버 린 것이다. “어머님이 유별나셔서 입대 전 날까지 얘기를 안 했는데 실무 배치가 한남동 보안부에 편한 자리로 된 거예요. 그 때 마침 월남에 가는 첩 보부대 얘기를 들어서 지원해버렸어요. 월남 가는 것도 그 전날에야 집에다 얘기했죠. (웃음)” 그의 나이 17살.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나이에 전쟁터로 뛰어든 것이다. 당시에 베트남어와 영어 모두에 능통한 인재가 얼마나 있었 을까. 때문에 일반전투부대가 아닌 첩보부대(HID)에서 17살 소년은 너무나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시내에 있으면서 미국 CIA 산하의 피닉스에서 정보를 얻고 정보원 들을 관리하고 포로가 오면 심문을 하죠. 주로 적들이 은신해 있을 비 밀 동굴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심문을 했어요.” 유창한 베트남어 실력 덕분에 현지인들과의 문제를 해결하고 기자 들을 상대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주민들과 베트콩을 아군의 협조 자로 포섭하는 일도 그가 맡은 일이었다. “비가 엄청 오는 겨울날, 혼자 베트남 주민처럼 위장해서 조그만 동 네까지 나룻배를 저어서 가요. 부락의 촌장을 만나서 인삼주 같은 걸 선물하면서 ”베트콩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주면 쌀 몇 가마니를 주 겠다.” 이런 협상도 하곤 했어요.” 그가 해병 첩보부대(HID)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에는 의심의 Vol. 37 대한민국 해병대 www. rokmc.mil.kr 45 Peoples 한국의 고갱 을 만나다. 열정의 화가 최동열 월남에서 돌아온 해병, 화가가 되다. 그림보다 더욱 뜨거운 삶을 산 백발의 노신사. 60의 나이에도 일탈을 꿈꾸는 자유로운 영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