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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아파트에 틀어박혀서 내내 책만 쓰면서 시간을 보냈어. 결국 출판사와 계약이 돼서 원고를 넘겼는데, 그 회사가 또 부도가 나버리 더라고. 시련이 겹치니까 참 끝도 없는 거야.” 하지만 그 기구한 삶과 열정에 감동한 형설출판사의 회장이 선뜻 그 를 도와주겠다고 나서면서 그의 책은 그렇게 한 권, 두 권 세상의 빛 을 보게 된다. 하루는 책에 들어갈 돈가스 사진을 찍는 날이었다. 큰 아들 동현이를 따라 놀러온 친구들에게 일류 요리사의 돈가스는 너무나 맛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에게 끌려온 동네 아줌마들까지 사로잡아버린 그 맛. 그 아줌마들의 성화에 소스를 팔기 시작한다. 아름아름 소문 이 나 작은 생수통으로 몇 백개를 팔았다. “그걸 보고 마누라가 장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나봐. 친척 들한테 돈을 빌려와서는 나한테 말 도 없이 7평짜리 구멍가게를 하 나 얻은 거야.” ’95년 7월 1일. 그렇게 테이블 세 개짜리 가게에서 일본식 요릿집을 시작했다. 하지만 한 달 동안 손님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찾아온 동네 시정잡배 같은 손님에게서 입소문은 시작됐다고 한다. “반바지 차림에 껄렁껄렁하게 “뭐 좀 할 줄 알아요?” 라면서 고등어회 1인분을 시키더라고. 임마가 몇 점 먹더니 자세가 달라져. 나갈 땐 정 중히 실례했다며 나가더니 다음 날 양복을 차려입고 오더라고. 백발 이 성한 노신사 한 분과….” 그 노신사는 한국영화협회 회장이었고 그 때부터 입소문은 시작됐 다. 테이블 3개는 늘 만원이었고 가게 밖은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졌다. 테이블 3개로 하루에 400만 원씩 매출을 올렸다. 그 Vol. 37 대한민국 해병대 www. rokmc.mil.kr 41 Peoples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일식집으로 키워낸 것도 그이다. 휴가 나온 해병 들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해병 356기 로 입대했다는 그는 요리라는 한 길에 인생을 다 바친 부산 사나이였다. “와…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그 때 훈 련 생각을 하면 아직도 아찔해. 요즘 훈련은 훈련도 아니지. 그래도 빨간 명찰 달 때의 희열은 안해 본 사람은 말도 못하지.” 얼핏 봐도 다혈질일 것 같은 그는 아 니나 다를까 타군에서의 위탁교육에 서 사고를 치고 퇴교를 당한다. 갈 곳 을 잃고 포항에서 군 건물을 짓는 일 에 잠시 투입됐던 그는 영농반의 오리 농장에 배치된다. 목장을 하는 집에서 태어나 군대에서까지 그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그이다. 그는 결국 호텔에서 잠시 일을 했던 것이 연이 되어 전역할 때까지 연 대 본부에서 조리병으로 근무하게 된다. 그리고 전역 후, 부산 코모도 호텔에 취직하면서 요리는 점점 그의 인 생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몰려드는 일본인 손님들 을 상대하기 위해 독학으로 일본어를 마스터했다. 이 때 인연이 닿은 한 일본 손님이 보내준 요리책은 김원일의 인생을 바꿔 놓는다. “그 요리책을 보는 순간, 그 동안 요리랍시고 했던 것은 요리가 아니 었던 거야. 돼지죽이었던 거야. ‘아! 요리도 공부를 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지.” 유학을 가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일본을 왕복하는 화물선을 2년 간 탔다. 배가 일본에 정박할 때면 요리학교 아베노쯔지를 찾아가 입 학 절차를 밟았다. “지금 생각하면 배짱도 참… 가방 하나에 옷이랑 일한사전, 한일사전 딱 두 개 놓고 2만 원 들고 간 거야. 그냥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해병 대 정신으로 간 거지.” 그 사 정을 딱하게 여긴 한 재일동포 사 업가의 도움으로 나라 지방에 일할 곳 과 숙소를 제공받았지만 오사카까지 통 학하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부 산에서 대구 정도되는 통학거리. 꼭두 새벽부터 탄 기차 안에서도 그는 결코 쉴 수 없었다. 졸릴 때면 요리용 펜치로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공부에 몰두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학업과 일을 병 행하며 힘들게 마친 유학생활. 최고의 학교에서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한 그 는 자신만만해 있었다. 정통 프랑스 요리와 일본 요리가 가능했고, 일본어 와 프랑스어도 능통한 그의 이력서. 하지만 서울 유수의 호텔에서 그는 번 번이 퇴짜를 맞는다. 너무나 화려한 이력서가 문제였다. 서럽고 비참했던 그는 이틀 만에 다시 일본 땅으로 돌아갔다. 아베노 쯔지의 이시나베 교수가 운영하는 식당에 취직한 그는 모든 궂은일 을 도맡아 하며 교수와 직원들의 신임을 얻게 된다. 신문에 소개된 쥐 사건도 이때의 일이다. “고양이만한 쥐가 있는데 아무도 잡을 생각을 안 하는 거야. 밀대로 냉 장고 밑을 쑤시니 쑥 나오더라고. 밀대로 치는데 안 죽길래 주먹으로 머리통을 박살 내버렸지. 그 때부터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지는 거야.” 그 자세를 눈여겨 본 이시나베 교수는 김원일에게 귀화를 권유했다. 제 대로 키워보겠다는 것. 하지만 김원일이 이를 뿌리치자 프랑스 유학을 다녀오라며 추천서와 비행기 표, 학비와 용돈 20만 엔을 선뜻 내밀었다. 유학 이후 그는 서울 힐튼호텔에 취직하게 된다. 하지만 그 생활이 그 리 오래 가진 않았다. 재벌가 큰 손님과의 다툼이 문제가 되어 2년 만 에 부요리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사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잘 나가는 국내 기업에서 그를 스카웃한 것. 대치동의 아파트와 자동 차가 주어질 정도로 좋은 조건이었지만 그가 맡기로 한 600석 규모 의 식당이 완공되기 직전 회사는 부도가 난다. ① 그의 가게에는 내노라 하는 유명인사들의 사인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② 그의 저서는 일본에서도 그 수준을 인정받을 정도이다. ③ 전역할 당시의 호리호리했던 부산 사나이 김원일 ④ 그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라는 '의용'을 직접 쓴 작품 1 2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