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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연평부대 인사과 중사 안준오 전투수기 대한민국 해병대 www. rokmc.mil.kr 19 Vol. 37 특 집_연평도 포격도발 우리 연평부대 인사과는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각자가 맡은 임무의 수행을 위해 분 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인사과장과 관사담당은 군 주택 시설물 확인을 위해 마을 인 근에 산재 해 있는 군 주택 시설물 점검을, 보임담당은 사격훈련 관측 업무를, 출도담 당은 선착장에서 휴가자 통제 중에 있었으며 행정담당은 22일 휴가를 출발하였으나 늦은 시간 인천에 도착하여 23일 고향으로 향하였다. 각종 감사 자료를 정리하고 밖 으로 나와 보니 멀리 당섬 선착장에는 평소처럼 여객선이 입항하고 있었다. 평화롭 고 소박한 섬마을의 풍경은 그때까지였다. 멀리서 포사격을 하는듯한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슝”하는 소리와 함께 헬기장 부 근에 포격이 가해졌다 그 순간 머릿속은‘혹시 오발인가’최소사거리? 고각의 최대 화? 앞뒤가 맞지 않았고,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는 찰라 마을과 부대시설 주변으로 연속적으로 적 포탄이 떨어졌다. 도발이 가해지고 있음을 확신하고 근무담당과 제2 회의실 주변의 인원들을 대피시설로 이동시키며 달려가 인근 대피소 총안구를 통해 주변을 관측하였다. 그 시각 임무수행을 마치고 복귀 중이던 인사과장과 관사담당은 포격이 어디에 떨어 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민간인 보호를 위해 어린이집의 어린이들과 교사, 길거리에 서 공황상태에 빠진 주민 및 어린이 등 수 십여 명을 대피시설로 이동시켰고, 출도담 당은 선착장에서 휴가대기자를 버스 승차책임자에게 인계하여 각 부대로 복귀시키 고 지통실로 돌아 왔다. 그 자리에서 우리 팀은 급히 임무를 분담했다. 우리의 임무는 전투행위가 아니라 적 공격으로부터 주민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근무담당이 먼저 도착한 버스로 출 발했고 나는 혼자 주차장 주변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중 1차 포격으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사 박용철에게 또 다시 포격이 가해질지 모르니 대피호로 이동할 것을 지시하였다. 잠시 후 버스 도착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주차장에 나와선 순간 또 다시“슝”하는 소리가 들려 건물 안 으로 몸을 피하는 동시에 부부대장실 쪽으로 떨어진 포탄에 의한 파편더미가 건물 속으로 쏟아져들어 왔다. 파편 가루가 채 가라앉기도 전 본관 앞으로 선착장 업무를 마친 출도담당의 차가 도착했다. 차에서 내 린 헌병근무자를 불러 건물 내부로 대피 후 또다시 포탄이 본관 주변에 떨어졌다. 잠시 뒤 포격은 멈 추었고 소강상태인 것으로 예상한 나는 버스가 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문제가 생긴 것으로 판단하였 다. 먼저 출발하여 주민과 연평어린이집 대피를 담당한 중사 정용균에게 연평 초등학교도 확인해줄 것을 요청하려는 순간 휴대전화가 불통인 것을 확인, 건물 밖으로 나와 문자 메시지를 통해 의사를 전 달하였다. 그리고 헌병근무자와 지통실로 이동하여 헌병대장에게 신변을 인계한 후 전시업무로 전 환 피해현황 및 사상자 파악에 나섰고 그러면서 부대의 피해상황이 속속 확인되었다. 전·사상자 가운데 故 서정우 하사는 22일 환한 웃음으로 만난 기억이 있어 너무도 가슴이 저려 왔다. 잠시 후 또다시 포격이 가해져왔고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임무수행을 위해 쏟아지는 포탄사이를 거침없 이 달렸다. 연평도 적 포격은 이렇게 지나갔고 그날 저녁에도 우리 인사과는 조를 나누어 대피시설에 있는 주민 들의 안전과 인원수를 확인하고 긴급물자를 지원토록 부대에 건의하여 지원하였다. 그날 밤 대부분의 주민들이 지원에 나선 병원선, 해경정 및 개인선박을 이용해 섬을 빠져나갔다. 24일 인사과 간부들은 부대 통제에 따라 남아있던 민간인 170여명을 개인 차량 및 부대차량을 이용하여 선 착장으로 이송하여 해군함정에 탑승시켜 인천으로 대피시켰다. 이때의 상황은 마치 성경에 나오는 노 아의 방주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다행히 휴가 중이던 행정담당이 인천항에서 주민들을 안전하게 안 내하여 임시 대피소로 이동하였다. 혹시 몸이 불편하거나 대피소식을 듣지 못해 마을에 남아있을 주민들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불이 켜진 건물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인적사항을 기록하여 추가도발에 대비하였다. 그 이후로도 사실상 치안공백상태에 빠진 마을 및 군 시설을 중심으로 순찰을 실시하는 등 임무를 이 어나갔다. 연평어린이집 유아들과 수 십여 명의 민간인을 대비시킨 인사과장과 관사담당, 적 포격 순간에도 관 측소를 점령하여 임무를 수행한 보임담당, 민간인의 대피계획을 실천한 근무담당, 선착장의 동요를 막고 휴가자를 포함한 민간인을 대비시켰던 출도담당, 연평도 적 포격 소식을 듣고 고향땅을 밟아 보 지도 못한 채 휴게소에서 다른 차와 미래해운 선박을 이용 복귀한 행정담당 이들의 질주가 있었기에 피해현황파악, 민간의 안전, 육지로의 안전한 철수, 빠른 안정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곳곳에서 많은 연평부대원이 강한 동료애와 근성을 보여주었으나 사기를 드높여야할 순간에 잘잘못 을 논하는 이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포격의 순간에 최소한 자신의 안녕을 위해 자세를 숙이지는 않았다.” 전투현장에는 사기충천한 연평부대원이, 불타는 마을에는 우리 인사과 팀이 달리고 있었다. 국민 을 위해! 불타는 마을 속 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