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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www.rokmc.mil.kr | '09년 11월의 호국인물(護國人物) 해병 삼등병조 이창환 전쟁기념관은 6∙25전쟁 당시 원산 동양리지구 전 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산화한 이창환 해병 삼등병조 (현 하사)를 11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하였으며, 지난 11 월 5일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현양행사를 가졌다. 이창환 해병 삼등병조는 1929년 8월 5일 경북 경 산군 진량면 다부동에서 이종수선생의 아들로 태어났 다. 이창환 해병 삼등병조가 소속된 해병대 3대대는 1950년 11월 평양 ~ 원산간 도로를 차단하고 준동하 는 적 패잔병들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런 데 당시 중공군의 공세가 날로 강성해짐에 따라 평양 ~ 원산 도로를 위협하던 적은 증원되어 당시 동양리 ~ 마전리 도로 통로 부근에는 적 패잔병 3,500여명 이 잠복 중에 있었다. 11월 20일에 해병대 3대대는 대대규모의 적 패잔병 들이 원산 ~ 평양 간 도로의 요충지인 동양리 일대를 장악하여 도로를 차단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러한 적의 의도를 저지하기 위해 제11중대를 출동시켰다. 제11중대장(박동열 중위) 가 출동할 시 1소대 2분대를 지휘하는 이창환 삼등병조가 첨병분대를 자원하였다. 이창환 해병 삼등병조는 첨병분대장으로서 전진 중 에 돌연 중화기를 소지한 적 200명으로 부터 기습사 격을 받고 11중대 전원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분대장 은 첨병분대를 지휘하여 과감히 적 진지에 돌입하여 중화기를 제압하려 하였으나 적의 집중사격을 받고 장렬히 전사를 하였다. 이 틈을 이용하여 중대는 완전히 방어태세로 전환 하여 위기에서 탈출하였다. 이창환 삼등병조가 지휘하 는 첨병분대의 활약이 없었다면 수적으로 불리하고 이동중에 적에게 노출되어 있던 11중대는 자칫 매우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잘 극복하였다. 이후 적 패잔병들은 중공군이 장진호전투를 개시할 무렵인 11월 하순에는 이를 지원할 목적으로 동양리와 마전리 일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이때 동양리의 해병대 3대대는 고립되어 보급지원마저 받을 수 없는 위기상황을 맞았으나, 이창환 삼등병조의 살신성인 정 신을 본 받아 감투정신을 발휘한 결과 원산에 주둔하 고 있던 미 제3사단과 연결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 다. 이창환 해병 삼등병조가 몸소 보여준 살신성인의 자세는 군인정신의 귀감이 되었으며, 우리들에게 영원 한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 호국인물 추모 현양행사 ▲ 해병대사령부 참모장의 고인에 대한 분향 글∙사진 / 사령부 정훈공보실 해병대 '09년 11월의 호국인물(護國人物) (1929. 8. 5 ~ 1950. 1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