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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3월 27일 남해안 시전리앞 바닷가에 수많은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며 바다를향해 함성을 울리며 손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푸른 바다엔 둥구런 괴물 하나가 하얀 연기를 뿜어대며 힘차게 파도를 가르며 바다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이것이 이 나라에 새로운 꿈과 희망을 갖게했던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진수식 장면이다. 7년이라는 전화속에서 갖은 착취와 고통들을 감내해야했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몇개월전에장군께서는적의침공을예견하시고거북선을 진수시켜 나라를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한 너무나 소중한 사건이다. 그래서 400년이지난 지금도 그분의 탄생을 기념하며 그를 흠모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무과에 급제하여 최초로 함경도땅 동구비보의 군관으로 보직 되면서 외로운 군인의 길을 걸었으며 무능하고 출세지향적인 상관들 틈 속에서도 철저한 군인으로서의 자세를잊지않으시고주어진임무를성실히수행해왔으나 잘못된 틀에 휩싸여 그 정의를 받아드리지 못하는 상관들에 의하여 철저히 무시되고 외면 당함으로써 장군님의 고난의 행군이 백의종군이라는 형벌로 시작된 것이다. 수 많은 전과를 달성하여 군에서만이 아니라 지역 주민에게 까지도 존경받던 그에게 청탁거절죄로 계급강등, 잘못된 전세판단을 조언한 죄로 체포, 구금, 각종 고문 등이 자행되어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갈수밖에 없었던 고통을 그에게 안겨준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정탁의 눈물겨운상소“신구차”에 의해 목숨을 부지하여 종국엔 12척의 배로 133척의 외선을 격파했던 명랑해전의 기적을 만들어 내셨고, 적을 이땅에서 몰아내는 최후의 일전 노량해전 까지 승리로 장식 하신후 장렬히전사하셨던세기의영웅이시기때문에우리국민은 4월 28일을 국민적 축제로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후 400여년이 지난 1950년 이 나라는 또다시 전화에 휩싸여 양민을 포함 3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엄청난 전쟁이 한반도를 휩쓸었다. 위정자들의 잘못된 정세판단, 나비넥타이에 주말이면 파티를 즐기던 군 수뇌부들의 안이한 국방대비 등이 더하여 단 3일만에 수도가 점령되고 몇개월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이제 자유대한민국의 최후가 눈앞에 있었다. 이때 국민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안겨주었던 해병대가 혜성같이 나타났다. 국토를 종행무진 적진을 뚤고 휘저으며 모처럼의 승리의 소식을 국민들게 안겨주었다. 마치 임진왜란 해전에서 거북선이 적의 선단속을 헤처 파멸시키듯이 말이다. 낙동강 방어선의 가장 핵심적 방어지역인 진주 마산지역을 맡아 적을 격퇴시킴은 물론, 통영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적의 한반도 서남방 침투를 저지하므로써 낙동강 방어 전선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전사에 빛나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도 서울 탈환에 앞장서서 중앙청에 태극기를 꼽는 영광을 쟁취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에 따라 일진 일퇴의 전쟁은 계속 되었다. 이때 우리 해병대는 전선의 핵심지역에서 백전백승의 신화를 만들어 내면서 국민들에게 기쁨을 드릴수 있었고 사랑을 독차지 할수 있었다. 특히 1951년 6월 4일부터 7월 4일까지 벌어졌던 도솔산 전투는 전투참가 해병의 거의 반수이상의 목숨을 잃어가면서도 전략적 요충지였던 1,000고지 도솔산에서 북한군 12사단을 격퇴하여 역사에 빛날 전과를 올려 당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무적해병” 이라는 휘호를 받았던 것이다. 그 외 에도 많은 전투에서 승리의 신화를 만들어 냈다. 그뿐이 아니다. 월남전에 최초의 전투부대로 참여한 해병 청룡부대의 활약상은 전세계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줌으로써 한국의 국가브랜드 향상에도 크게 기여 하였다. 뿐만 아니라 평상시 강인한 4월 15일은 국민축제일이 되어야 한 다.  양 해 범 60• June 2009 해병대 |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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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