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page

한국군 파병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며 www.rokmc.mil.kr• 41 군 생활 중 영웅심도 느껴본 곳이기도 했다. 다음 행선지는 해병대 6대작전의 하나인 츄라이 지역 짜빈동전투 현장답사였다. 그러나 짜빈동 전투지역 입구에 세워진 전승비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나 새겨진 비문은 월맹군의 무이타이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승전 기념비로 대체 되었다. 짜빈동 전투의 살아있는 태극무공 훈장의 영웅인 당시 소대장이였던 신원배(현 재향군인회 해병대 부회장) 중위가 생각났다. 짜빈동으로부터 약 30㎞ 떨어진 퀴논은 맹호부대가 위치하던 곳이다. 맹호부대가 큰 전공을 세운 안케패스 작전 현장을 답사했는데 638고지에 건립된 전승탑은 높고 먼 곳에 위치하기 때문인지 월맹군이 건드리지 않아 현장이 그대로 보존되어 참으로 다행 이였다. 전승비에는“월남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이곳 안케패스 작전에서 장 렬히 산화한 맹호영령들이시여 고이 잠드소서”란 한글 글씨가 너무 선 명했다. 퀴논으로부터 20㎞남쪽 투이호아는 내가 66년도 소대장, 부중대장을 했던 곳이다. 멀리 우리 2중대가 위치했던 216고지가 보였고 동기생 오영지 중위가 전사한 푹미 마을도 차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청룡 부대가 최초 상륙했던 캄란베이는 수심이 깊어 대형 선박의 정박이 가능하고 비행장이 위치하고 있어 구 소련이 호시탐탐 하던 전략적 요충지이다. 월남전 당시는 호치민 루트 폭격과 작전부대의 근접항공지원 전투기의 굉음 소리가 요란했던 곳인데 지금은 초라한 민간 공항으로 전략 되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한국군 월남참전 발자취를 답사 하는 과정을 모두 끝냈다. 우리가 승전국이 되고 끝까지 자유월남을 지켜주었다면 승전의 현장이 보존되어 더욱 자부심을 느낄 수 있으련만 하는 아쉬움이 밀려 왔다. 월남 패망의 교훈 월남국민의 안보 불감증과 정부의 부정부패는 국가 패망의 씨앗을 잉태했다. 정부 요소요소와 사회각층에 침투된 간첩 그리고 불평 세력의 과격한 시위로 인한 분열양상은 국가 통치력을 잃었다. 반면 월맹에는 청렴과 솔선수범의 지도력을 갖춘 호치민이라는 걸출한 애국적인 지도자가 있었다. 어떠한 국제간의 동맹과 약속도“자국의 국익보다 우선할 수 없다”미국은 국민의 여론에 따라 월맹과는 파리 휴전협정(73.1.27)을 체결하고 월남과는 월맹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을 개입시켜 북폭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한다는 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미군과 연합군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1975년 3월 10일 월맹군이 총공세를 개시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해 티우 대통령이 하야하는 풍전등화의 위기가 닥쳤을 때 미국은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았다. 58만 명의 병력, 세계 4위의 공군력에도 불구하고 자유월남은 소금만 가지고 하루 두끼 식사를 겨우 할 정도였고 군화가 없어 타이어를 잘라 끈으로 묶은 채 질질 끌고 다니는 거지군대에게 패했다. 자국의 국익 앞에서는 어떠한 방위 조약도 한 장의 휴지 조각이 될 수 있다는 국제사회의 비정한 현실을 우리는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해병 대령으로 퇴역하였습니다.) 통일궁에서 기념촬영 마블 마운틴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 638고지 전승비에서 기념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