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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과 해병대는 같은 뿌리 www.rokmc.mil.kr• 33 배려와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물론 302 정장인 내가 여순 반란 브리핑에서 건의한 것이 단초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당시 해군은 총 병력 3천여 명에 함정세력도 소해정 등 아주 빈약한 처지에서는 해병대 1개 대대 정도의 병력 규모 창설도 감히 어림없는 여건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그의 해병대 창설 결단은 그야말로 한국을 사랑했던‘하나님의 기적’이던가 아니면 손 제독의 특별한 미래 예측‘혜안(慧眼)’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둘째, 그가 창설한 해병대가 해군의 요람인 진해 군항과 임시수도 부산을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구한 사실이다. 전사를 살펴 설명해본다. 6・25전쟁 초기인 50년 8월 연전연패해 전 국토의 5분의 4가 유린당하던 때였다. 인민군 6사단과 7사단은 통영, 진동리, 마산, 진해 앞까지 침공하였다. 이때 한국 유일의 해군 군항인 진해는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진해가 함락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군도 국군도 낙동강 전선 방어 때문에 안중에도 없었다. 이때 손원일 총장이 창설한 해병대만이 통영에서 한국 최초의 해군・해병대 단독 상륙작전을 펼쳐 인민군을 격파, 진해 군항을 사수하여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에게 보답하였다. 이를 우리 해병대는 지금도 큰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처럼 해군에서 창설시킨 해병대가 진해 군항 (軍港)을 유지시켰고 이로 인하여 오늘날 해군은 장족의 발전을 하게 되었다. 김성은 해병대사령관은 훗날 최장수 국방부장관이 되어 옛날 해병대를 전폭적으로 배려한 손원일 제독처럼 구축함 도입과 고속정 조함 등 해군 현대화에 남다른 집념을 보였다. 역사가 우리에게 여과 없이 설명하는 대목이다. 진행 군항을 지킨 김성은 부대의 영웅적 전투 결과, 적의 거제도 점령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진해는 물론 거기서 차량으로 불과 1시간 거리인 부산의 임시수도를 지켜냈다. 이러한 해병대의 공적은 곧 손원일 제독의 준비된‘혜안(慧眼)’덕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손 제독이 해병대가‘뚫리면 한국이 멸망한다는 부산’ 을 건져내 구국(救國)을 성취한 점이 그의 선각자로서 두 번 째 사 례 가 된 다 . 셋째, 손 제독의 결단은 그가 인천상륙작전과 수도 탈환이라는 유엔군 연합작전에 당시 걸음마 단계로서 보잘것 없는 해군, 해병대를 참전케 함으로써 나라의 위신을 살리는 자부심을 갖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해군 해병대가 연합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그 진가를 발휘하였음은 물론 대한민국이 승리한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였고 전후 긴밀한 한・미 동맹의 유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앙청에서 우리 손으로 태극기를 게양하여 국민과 이승만 대통령 으로부터 우리 해군과 해병대가 국민의 군대로서 전폭 적인 신뢰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결국 손 제독의 선견지명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것이다. 해병대 출신 김성은 부대가 진동리 전투를 마치고 파김치 같이 지쳐 있을 때 일이다. 낙동강 전선-안강- 영천지구로 이동하라는 신성모 국방부장관의 지시가 떨어졌다. 만일 그 지시에 따랐다면 해병대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손 총장은 김성은 부대장의 읍소(泣訴)에 가까운 휴식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여 진해로 이동해 휴식을 취하게 해 주었다. 또 개전 초기에 제주도 해병대사령부가 부산으로 이동한 후 제주 출신 학도병 3천여 명을 낙동강 전선으로 보내려는 국방부의 지시를 손원일 제독이 막고 이들을 미 해병대와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투입했다. 이 일은 한・미 두 나라 해병이 형제 해병이 된 결정적인 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