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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June 2009 해병대 | 특별기고 생각나는 분은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이다. 무엇보다 오늘의 해병대가 있기까지 그 분의 공로는 아무리 강조 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손원일 제독은 원래 부친 손정도 목사께서 해외에 계시면서 독립 운동에 헌신했기 때문에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정치의 길을 권유했다. 하지만 손 제독의 의지는 확고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미래는 바다를 어떻게 지배하느냐에 있다. 세계적으로도 모든 선진국들은 해양국가로서 바다를 지배하는 국가다. 경제활동을 해상에 의지해야 하는 이 시점에 해군의 증강은 필수적 이다.” 그리하여 그는 귀국한 즉시 진해로 내려가 해군 창군에 모든 정열을 쏟아 1945년 11월 11일 해군의 초석 (礎石)이 된 해방병단을 창설했다. 우리는 오늘의 해군이 있기까지 원동력이 되었던 손 제독의 멸사봉공의 추진력을 우리 후배들은 길이길이 간직해야 할 것이다. 손 제독은 해군 창설에 이어 여순 반란사건을 계기로 해병대를 창설하였고, 그 후 작은 소수의 해병대가 수많은 위기를 잘 넘길 수 있게 끊임 없는 사랑과 지원을 해주었다. 나는 해군사관학교 1기생으로 손원 일 초대 교장으로 부터 수업을 받았고, 여순 반란사건 때는 작전경과 보고를 하면서 해병대 창설을 건의하였다. 한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 인수 시는 손 총장님을 수행 하는 명예를 가지는 등 그는 나의 군 생활 중 잊지 못할 은인이었다. 더욱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해병대가 겪는 고비 때마다 그가 베풀어 준 극진한 배려였다. 구국의 세 가지 혜안(慧眼) 나는 지금도‘손원일 제독께서 국가의 주요한 고비 마다 선각자로서 혜안(慧眼)을 가지고 어찌하여 그 같은 결정을 내리셨을까’하는 세 가지 결단(決斷)을 골똘하게 회상한다. 먼저 첫째 결단은 6・25전쟁 발발 불과 1년 전에 해병대를 창설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것이다. 1948년 여수 순천・반란사건을 계기로 손 제독은 1949년 4월 15일 해병대를 창설하였다. 380명으로 출발한 해병대가 오늘과 같이 성장한데에는 손 총장의 1953년 임진강・장단 전선에서 손원일 해군참모총장과 본인 공정식 해병제3전투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