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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rokmc.mil.kr DECEMBER 2008 71 논길을 거닐다 보면, 축축한 논둑길의 진흙이 신발에 달라붙는다. 약간은 귀찮지만 조금 비린 듯한 물냄새가 논에서 풍겨 나온다. 아마도 민물고기에서 나는 듯한 비 릿한 논의 냄새... 하지만 이 냄새를 역겨워 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신선한 느낌이 더 크다고나 할까? 논길을 거니는 것은 어느 계절이 가장 좋을까? 라고 생각해 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이 가을 추 수를 앞둔 황금들판의 논길을 것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 각할 것이다. 하지만 난, 여름 논길을 가장 거닐고 싶다. 여름 논길은 재미가 있다. 내가 걸으면 개구리가 놀라 뛰고 덜 자란 벼들이 고개를 바싹 쳐들고 나를 쳐다본다. 하지만 이놈들도 비가 한번 크게 오면, 얻어맞은 사람 처럼 풀이 죽어 누워있다. 이놈들이 사람은 안 무서워해 도 장마형님에게는 속수무책인 놈들이다. 여름 논길은 가을보다 시원하다. 객관적인 잣대를 대며 온도를 이야기하는 사람 앞에선 뭐 그리 할 말은 없지만, 원래 사람 느낌이란 것이 주관 적이라. 어쨌든 난, 여름 논이 가을 논보다 더 시원하다. 저 멀리 파도처럼 바람과 함께 푸른논이 철썩인다. 논둑 중간에 있는 나를 지나 둑 넘어 푸른벼도 시원하게 철썩 인다. 가을엔 난 산길을 거닐어 본다. 안개가 끼면 산길 자체 가 오묘하다. 마치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거닐듯, 구름속의 산책을 하듯, 안개 낀 날의 산길은 신기함으로 가득하다. 가을산은 커리어 우먼의 화장색이다. 갈색 톤으로 세 련되게 마무리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도심 속 커리어 우먼들의 자신 있는 걸음걸이와 도도 한 자태가 산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과연 몇 이나 될까? 가을산은 단풍이 들고 나서 더욱더 요염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을 산길을 거니는 이유는 그 산을 정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흔히 등반가들은 산을 정복하 는 맛에 오른다고 한다. 그래서 겨울등반이 오르기 힘들 기에 정복의 매력이 더 있다고 한다. 하지만 가을산은 과 정자체가 슬슬 거니는 것의 연속이다. 목표를 가지면, 산길에 나타나는 자연의 섬세함을 결 코 맛볼 수 없다. 특히 붉은색과 갈색 톤으로 때로은 은 은하게 때로는 정열적으로 변화하는 이 산길은 천천히 거니는 자에게만 여유를 선사한다. 오늘 난 바닷길을 거닐었다. 가을도 아니고 봄도 아니 고 여름이 다가오는 더운 봄 아니면, 덜 더운 여름에...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깨달았다. 난 겨울에 거니는 것 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언제나 사람들에게 말하지만 바닷 가에서는 겨울에 거닐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밋밋한 해풍이 춥지도 덥지도 않은 한숨가득 습기 먹 은 해풍이 오늘 거니는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는 다. 차라리 겨울에 칼을 품은 찬바람이 거니는 사람의 마 음을 파고 들 때 그 나그네는 더욱더 서러움에 복받쳐, 누군가를 그리워 하는게 아닐까... 겨울파도의 하이얀 포말도 서럽도록 드넓게 펼쳐진 바 다도 바닷길을 거니는 나그네의 마음을 그토록 스산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파도가 몰고 온 차가운 바람이, 겨울산책에 날 빨리 걷게 했던 날카로운 바람이, 바닷길에 홀로 걷는 나그네의 마음을 울리는 감성 촉 진제가 된다는 걸 오늘에야 깨닫는다. 거닐다 보면 참 많은 생각이 난다. 논길은 유년시절을, 산길은 작은 반성을, 바닷길은 누 군가를 그리워하게 만든다. 산책이 습관이 된 나는 매일 출퇴근길을 여유 있게 거 닐곤 한다. 퇴근길은 하루를 마무리하게 해주고, 출근길 은 하루를 벅차게 해준다. 금요일 퇴근길은 일주일을 마 무리하고 다음 주 월요일 출근길은 한 주일을 기분 좋게 만드는 힘이 있다. 주말 산책은 내가 충분하게 그리고 기분 좋은 휴일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거닐다 보면 우리 는 사랑하는 아내의 손을 한 번 더 잡을 수 있다. 그래서 난 거니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