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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rokmc.mil.kr DECEMBER 2008 23www.rokmc.mil.kr DECEMBER 2008 23 동상 참배식은,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앞에서 9. 9.(화)일 08:50분부터 09:05분까지 15분간 해군참모총 장, 해병대사령관 등 주요 인사 24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으며, 참배 이후 인천해역방어사령부로 이동, 09:20분에 상륙주정(LSF-II 1대, LCU 1대)에 탑승하 여 독도함으로 이동하였다. 해상 헌화는, 09:45부터 09:50까지 독도함 함상에서 주요인사와 학생 및 시민대표 등 21명이 3회에 걸쳐 실 시하였으며, 전몰장병 및 호국영령의 넋을 위로했다. 상륙작전 재연은, 10:00부터 30분간 월미도 해상에서 실시됐다. 선견부대작전은 해병대 수색대의 저고도 해상침투 캐 스팅, 해상강하, 고속단정을 이용한 퇴출, 맥과이어 훈 련으로 진행하였다. 해상돌격은 독도함과 향로봉함에서 진수한 상륙돌격 장갑차(KAAV) 26대가 3개 파를 형성하여 퍼레이드를 펼쳤다. 헬기돌격은 UH-60 2대, UH-1H 4대, AH-1S 4대 등 총 10대를 통해 연출했다. 인천상륙작전 기념식은, 월미도 문화의 거리(인천광역 시 중구 북성동 소재)에서 11:00부터 12:20까지 행사인 원 1,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인천상륙작전 전황보고 와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의 회고사, 인천광역시장의 환영사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해군참모총장의 축사, 해 병대사령관의 기념사를 통해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의 의을 조명하고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드높였다. 또한 행 사 간 군악대와 의장대의 시범과 태권도 시범이 이뤄졌 으며,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 장면 등 역사 사진 31점 과 해병대 관련 사진의 전시회도 함께 준비하여 시민들 에게 볼거리를 제공했다. 인천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조수간만의 차로 인해 상륙작전 시간의 제한과, 협소한 수로로 인한 기동공간 의 제한 등 여러 악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군사 전 문가들은“성공확률 1/5,000 밖에 안 되는 세기의 도박” 이라고 작전을 폄하했지만,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하였고, 6·25 전쟁의 전세를 전환시켰으며, 서울 수복의 길을 열어「세기의 상륙작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작전은 美 해병대 제1사단, 美 제7보병사단, 韓 해병대 4개 대대가 상륙작전에 참가하였고 후속상륙 부 대인 韓 육군 제17보병연대를 포함하여 총 261척의 함정 과 75,000명의 병력이 참가한 역사적인 대규모 상륙작 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전쟁사적 의의는, 첫째, 마산-왜관- 포항을 연결하는 소위‘Walker Line’이라는 낙동강 전 선의 적을 급속히 와해시켰고, 둘째, 적의 병참선을 차 단하여 적에게 물리적·심리적 교란 효과를 달성하여 적 의 전투의지를 파쇄시켜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셋 째, 지상 반격 시 예상되는 유엔군의 인적·물적 시간적 손실을 최소화하고 인천 항만시설과 서울에 이르는 제반 병참시설을 북진에 용이하게 이용하도록 했고, 넷째, 전 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장애요인을 극복하고 성공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해병대사령관은 기념사를 통해“인천상륙작전은 58년 전 오늘 한·미 해병대는‘세기의 도박’이라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온갖 악조건을 극복하여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의 운명을 되살리는 일대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평 가하며, “3,200명의 고귀한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 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없었을 것이며, 선배 해병들이 쌓아놓은 찬란한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호국충성 해 병대」로서의 임무를 더욱 충실히 수행할 것.”이라고 강 조했다. 당시‘크로마이트 작전’으로 명칭된 인천상륙작전은 6·25 당시 풍전등화의 조국에서 서울 수복의 길을 열 어 전란 속에서 국민들에게 승전의 희망을 준 의미 있는 상륙작전으로, 해병대와 인천광역시는 참전용사에 대한 명예선양 및 국민안보의식 고취와 해병대 전승의 역사를 길이 계승하기 위해 매년 9월 인천광역시 일대에서 행사 를 실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