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page

> > > REPUBLIC OF KOREA MARINE CORPS www.rokmc.mil.kr JUNE 2008 57 부에 열중하던 나는 머리도 식힐 겸 당시 해병대 6여단 장으로 재직 중이던 아버지를 뵙고자 백령도를 찾았다. 옹진호를 타고 12시간여를 항해한 끝에 도착한 백령도 는 그야말로 문명사회와는 동떨어진 절해의 고도였다. 소주는 반입금지품목으로 지정되어 선착장 검문소에서 엄격하게 통제되고 어쩌다 밀반입된 소주도 동네상점 에서는 육지보다 10배 이상 높은 가격에 밀거래되고, 난방은 주변 야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때는 등 열악한 생활환경이었다. 일반인들의 생활수준이 이러할진대 대원들의 생활환경은 오죽하였을까? 이곳에서 약 1주 일간을 생활하면서 나는 일생일대의 가장 중대한 결심 을 하게된다. 어느 날 저녁, 야간순찰을 마치고 돌아오신 아버지와 나는 식탁에 마주 앉아서 아버지의 인생역정과 앞으로 나의 진로에 대해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사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는 줄곧 떨어져서 살아왔던 이유로 이렇게 마주앉아 진지 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기가 쉽지 않은 터 였다. 아버지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해병대 장교모 집에 응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통역장교로 임관되어 장 단지구전투에 참전하고 휴전 이후에는 보병장교로 전 과되어 각급 제대의 지휘관과 참모직을 수행하면서 우 리 해병대와 창설 초기부터 고락을 함께 해오셨던 분이 다. 당신의 인생길을 회상하시면서 내게 가장 큰 감동 을 주었던 것은“승주야! 아빠가 한국전쟁통에 굶주림 에 시달릴 때 나를 받아준 것도 해병대요, 지금까지 가 정을 꾸리고 너희들 건강하게 키울 수 있었던 것도 해 병대 덕분이라 생각한다. 내 자식이 이제 다 커서 해병 의 길을 가겠다고 한다면 기꺼이 해병대를 위해서 바칠 수 있단다....”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찡해지 면서 평생을 해병대 일원으로 살아온 노병의 국가와 조 직에 대한 무한한 충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작년 이맘쯤으로 기억된다. 대학입시를 한창 준비 중 이던 아들 녀석이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아빠, 성적이 어느 정도 나오는 것 같은데, 일반대학에 지원하면 안 될까요?”사실 미국에서 3년간 중등과정을 보내고 복학 한 아들 녀석은 귀국 후에 동급생의 학업수준을 따라잡 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사관학교 진학을 원했던 녀석은 높아진 사관학교 입시수준에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으리라. “준범아! 아빠는 할아버지의 국가 와 해병대에 대한 끝없는 충정과 사랑에 감동되어 해병 대 장교가 되기를 원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젊은 시절 나의 결심에 조금의 후회도 없단다. 네가 우리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면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도 무척이나 기뻐하실게다.” 이제 갓 입학하여 생도 1학년으로 바쁘게 생활하고 있 는 아들 녀석을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애처롭기도 하지 만 늘 자랑스럽고 든든한 마음이다. 이 아이도 앞으로 내가 걸어왔던 길을 그대로 따라 걸어가게 되겠지. 30 년이 지난 후에도 지금의 결심에 조금도 후회없는 삶을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