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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29집 101 하므로 나는 부득이 자기의 필적이 능하지 못하고 또 남이 웃음거리가 될 것도 생각지 않고 매일 몇 시간씩 글씨를 썼다”라고《안응칠역사》에서 밝히고 있 다. 51) 그들 유묵 속에는 하나같이 동양평화를 기원하며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안 의사의 깊은 뜻이 담겨있다. 겨레의 보물로 길이 보존하고, 아울러 미발견 유묵의 조사․수집에도 힘써야 한다. Ⅶ. 맺 음 말 안중근 의사는 임형(臨刑)을 앞두고《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의 완성을 간절 히 원하였고, 그것은 반드시 ‘사후에 빛을 볼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52) 때문에 안 의사는《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에서 ‘일본국 4천만이 안중근의 날을 외칠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동양의 평화가 이렇게 깨어지니 백년풍운이 어느 때에 그치리요. 이제 일본 당국자가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으면 반드시 이 정책을 쓰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공정한 마음이 있었던들 어찌 이와 같은 행동 을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말을 덧붙였다. 53) 《동양평화론》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순국한 탓도 있지만 100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 진실을 우리는 알 것 같기도 하고 정확하게 모를 것 같기도 하다. 어찌보면 안 의사가 주장하던 동양평화론은 미심한 곳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그 동안 이 《동양평화론》은 사형언도 직후 히라이시(平石氏人) 고등법원장과의 면담초록인 〈청취서(聽取書)〉 54) 와 당시 언론보도 등의 기사 55)를 근거로 했을 정육(鄭淯)의 《안중근전》중의〈삼국화회지대원(三國和會之大願)〉 56) 및 통역 소노끼(園本末 吉)의〈수기(手記)〉 57) 등을 근거로 여순(旅順) 군항을 중국에 돌려주고 그곳을 동양평화의 근거지로 만들자는 내용의 몇 가지 제안을 범주에 넣고 논의되어 왔다. 51) 앞의《안중근전기전집》, 129쪽. 52) 앞의 典獄 票原貞吉의 서한. 53) 앞의《안중근전기전집》, 127 및 180쪽. 54) 앞의《아주제일의협 안중근》3, 621~633쪽. 55) 중국 長春에서 발행한《吉長日報》1910년 3월 22일자 기사. 56) 앞의《안중근전기전집》, 549~550쪽. 57) 최서면,〈일본의 한국병합과 동양평화론〉《21세기의 동양평화론》, 국가보훈처, 1996, 85~8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