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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하얼빈의거와 순국 100주년의 성찰 98 군사연구 제129집 1일자의 것이다. 보낸 주소는 ‘진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 내 홍석구(洪錫九) 신 부’라고 되어 있고, 문안 간찰이다. 그러나 앞의 것은 일부에서 친필 여부에 대한 논쟁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고 뒤의 것은 안 의사가 연해주에서 마침 1908년 7월 이삼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진공작전을 전개, 회령(會寧) 영산(靈山)에서 대회전까지 치룬 후 화급한 일로 고향에도 못 들린 채 국내 수원 (水原)에까지 몰래 들어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부친 것이다. 안 의사의 행적과 관 련하여 주목되고 사실여부 부터 세심한 검토과제이다. 무엇보다 1910년 2월과 3월에 걸쳐 여순 옥중에서 휘호한 안 의사 특유의 고 귀한 유묵은 전하는 말로는 200여 폭이 작성되었다고도 한다. 47) 그러나 현재까지 한․중․일에 산재되어 필자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실물 또는 사진본 등을 합하 여 59편이다. 이밖에 사형언도 후 히라이시(平石) 고등법원장을 만나 동양평화를 설파할 때 휘호하였다는 위에 든〈천지가 뒤집혀짐이며 지사가 개탄하도다. 큰집 이 장차 무너짐이여 한 나무로 지탱하기 어렵다(天地飜覆 志士慨嘆 大廈將傾 一 木難支)〉와〈천지는 부모를 지으시고 해와 달은 밝은 빛을 비치다(天地作父母 日月爲明燭)〉,〈사람의 마음은 위태하고 도의 마음은 미묘하다(人心惟危 道心惟 微)〉,〈나는 이등을 해치고 다시 살려하지 않고 나는 동양평화를 근본으로 하여 살았다(害我伊藤不復活 生我東洋平和本)〉등의 4폭은 기록상으로 휘호된 내용까 지는 알 수 있으나 실물은 고사하고 사진으로도 확인할 수 없다. 안 의사의 이와 같은 유물은 남산 안 의사 기념관과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 등 국내 각처에 소장된〈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를 비롯한 26폭의 유묵만이 현재까지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보물로 지정되었다. 나머지 〈지사인인 살신성인(志士仁人 殺身成仁)〉을 비롯하여 최근 알려진〈독립(獨立)〉 등 30폭은 한․중․일에 산재되어 유묵, 혹은 유묵의 영인본으로만 알려져 국가 보물로서의 심의절차를 거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전래된 안 의사의 고귀한 유묵들은 먼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면이 주목된다. 하나는 모든 휘호 낙관 부분에는 ‘경술 3월 여순 옥중에서 대한국인 안 중근(庚戌三月(혹은 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安重根)〉이라 서명하고 반드시 단 지동맹시 약지를 자른 왼손의 장인(掌印)이 찍혀 있다. 안 의사와 그의 동지들이 단지동맹을 통하여 결성한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의 취지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47) 박은식,《한국통사》, 上海, 대동편집국, 1915, 16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