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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29집 93 라고 논찬하여 마지않았다. 또한 미완성의《동양평화론》의 각론 중에 거론할 수 있는 내용은 히라이시(平石) 고등법원장과의 면담기록인〈청취서(聽取書)〉 40) 등을 중심으로 종합하면 무엇보 다 일본은 그들이 러일전쟁 때 점유(占有)한 여순항(旅順港)을 청에 돌려주어 그 항구를 동양평화의 근거지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쪽으로 발해(渤海), 동쪽 으로 황해에 면하고 남쪽으로 산동반도를 지호지간의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귀순 군항(旅順軍港)은 중국 요령성의 요동반도 최남단에 자리 잡고 현재 행정구획상 대련시 여순구에 속에 있다. 이 여순항은 명대(明代)로부터 전략상 요충지로 기록 되어 일찍부터 중국 수군이 군항을 건설한 동양굴지의 부동항이다. 청대에 들어 와 중국 최대의 함대인 북양함대를 두고 군항을 확장하고 조선소와 수리도크 등 도 건설하였다. 이와 같은 군항을 대륙정책을 추진하던 일본이 청일․러일의 두 차례 전쟁 때 수만의 군병의 희생을 무릅쓰고 여러 차례 격전을 벌여 점유하고 만주침략의 주력 군단인 관동군(關東軍)의 근거지로 삼았다. 군항 뒤편의 안자산 (安字山)과 동서의 계관산(鷄冠山) 그리고 망태(望台) 이룡산(二龍山) 송수산(松樹 山)에 철통같은 포대와 보첩을 수년에 걸쳐 쌓아 난공불락의 여순요새(旅順要塞) 를 완성하고 만주 침략의 교두보로 삼았었다. 이와 같은 여순군항을 동양평화의 근거지로 만들려면, 첫째, 한청일 3국이 공동 관리하는 군항(軍港)을 만들어 3국 청년들로 군단을 편성하여 지키게 하고, 그들에게는 2개국 이상의 어학을 배우게 하여 우방 또는 형제의 관념이 높아지게 우의를 다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의 군 비는 여순항의 유지를 위하여 군함 5, 6척 정도만 정박시켜도 족할 것이라고 하 였다. 둘째, 여순에 한청일이 먼저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하여 동양평화의 방략을 세우고 실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평화회의는 장차 인도․태국․버마 등 동양 제국이 40) 사형언도 직후인 1910년 2월17일 안 의사의 平石氏人 고등법원장 면담요지의 기록을 〈청취서〉라고 표제하여 남겼다. 안 의사는 3시간에 걸쳐 “동양평화론”을 설파하였고 하 얼빈 의거의 이유를 국제정세를 예증하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였다. 앞의 국가보훈처의 《아주제일의협안중근》633쪽에 수록되었다. 이밖에 안 의사의《東洋平和論》의 미완성 내용의 일부는 통역 園木末喜의 수기가 있다고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이 증언하고 있다.(국가보훈처,《21세기와 동양평화론》, 1995, 87쪽). 또한 중국인 鄭沅의《安重根》 〈三國和會之大願〉20쪽과 長春에서 간행하던 吉長日報 1910年 3月 22日자 기사에도 논 급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