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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29집 91 흘렀다. 그것도 처음에는 동경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이 1969년 4월 동경 고서점에서 입수한《안중근자서전(安重根自敍傳)》이라 표제된 일역본이었다. 33) 유고 그대로의 등사본은 그 후 다시 10년이 지난 1979년 9월 재일교포 김정명(金 政明) 교수가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연구실 ‘칠조청미(七條淸美) 문서’중에서《안 응칠역사(安應七歷史)》와《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의 등사본을 합책한《안중근 전기급논설(安重根傳記及論說)》이라 제명한 것을 발굴함으로써 세상에 나타났 다. 34) 이것이 비록 안 의사의 친필본은 아니더라도 안 의사의 귀중한 유고 내용이 원문대로 전문(全文)이 ‘햇빛을 본 것’이다. 한편 우리는 안 의사의 친필 원본도 어디선가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다. “안응칠역사”는 안 의사 순국 80주년이 되던 1990년 3월 26일 안중근의사숭모 회에서 한문으로 된 원문 내용과 함께 국역본을 간행함으로써 안 의사의 행적과 사상, 그리고 의거를 이해하는 원전으로 활용되고 있다. 35) 특히《안응칠역사》는 일반적 자서전이 갖는 한계를 넘어 안 의사의 “진실한 자기 심정을 표백해 놓은 글이라, 저절로 고상한 문학서가 되고 또 한말의 풍운 속에서 활약한 자기 사실 을 숨김 없이 적어 놓은 글이라 바로 그대로 중요한 사료가 된 것임을 봅니다”라 고 소개한 바와 같이 ‘그대로 중요한 사료’이다. 그러나 안 의사는《안응칠역사》 서술에서 생존 동지들의 신변을 위하여 가능한 한 관련 인물들에 대한 언급을 자 제하거나 아예 생략한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하얼빈 의거 동지인 우덕순에 대 해서는 1908년 여름 국내 6진지역 진공 의병활동 대목에서 언급을 피하였고, 1909년 2월 연추 카리에서 행한 단지동맹 부분에서는 그때 동맹으로 성립한 동의 단지회(同義斷指會)에 대하여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안 응칠역사》는 격동과 시련의 한국근대사에서 큰 자취를 남긴 안 의사의 애국적 행 적과 올바른 위상을 정립하는데 다시 없는 보전(寶典)이 되는 저술이다. 한편 안 의사가 남긴 50여 편의 유묵 중에 “동양대세 생각하매 아득하고 어둡 도다. 뜻있는 남아가 어찌 잠을 이루리. 평화정국 못 이루었으니 한탄스럽기 그지 없다. 침략정략 고치지 않으니 참으로 가련하다.”(東洋大勢思査玄 有志男兒豈安眼 和局未成猶慷慨 政略不改眞可憐)라고 한 진귀(眞貴)한 글귀가 있다. 그의 큰 뜻이 33) 崔書勉,〈安應七自傳〉, 《外交時報》, 1970년 5월호, 東京, 外交時報社, 53~70쪽. 34)《東亞日報》1979년 9월 1일자 참조.; 市川政明,〈安重根ト七條淸美文書〉《安重根ト朝鮮 獨立運動ノ源流》, 東京, 原書房, 2005, 13~17쪽. 35) 안중근의사숭모회 편,《안중근의사자서전》, 1990, 서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