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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하얼빈의거와 순국 100주년의 성찰 90 군사연구 제129집 사형언도 직후인 1910년 2월 17일 면담〈청취서(聽取書)〉에서 “나는 지금 옥중에서《동양정책(東洋政策; 東洋平和論)》과《전기(傳記)》를 쓰고 있다. 이를 완성하고 싶다.” 30) 라고 밝히고 있다. 3월 25일로 예정된 사형집행을 15일 정도 연기해 줄 것을 요 청하여 언약까지 받았으나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됨으로써《동양평화론》은 미완 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안 의사의 이러한 저술 상황은 전옥 구리하라(栗原貞吉)가 1910년 3월 18일자 로 통감부 경시 사까이(境喜明)에게 보낸 서한에서 “안중근의《전기》는 이제 막 탈고하여 목하 청사중인 바 완료 즉시 우송할 예 정이지만 한편《동양평화론》은 기고하여 현재 서론은 끝났으나 본론은 3, 4절로 나누어 쓰되, 각 절은 생각날 때 집필하고 있다. 도저히 그 완성은 사기( 死期 )까지 어렵다고 생각될 뿐 아니라, 각 절을 조리 정연한 논문이라고 하기보다 잡감(雜感) 을 서술하려고 하기 때문에 수미일관한 논문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본인은 철저히《동양평화론》의 완성을 원하고 ‘사후에 빛을 볼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 전 논문의 서술을 이유로 사형의 집행을 15일 정도 연기될 수 있도록 탄원하였으나 허가되지 않을 것 같아 결국《동양평화론》의 완성은 바라기 어려울 것 같다.” 31) 라고 보고한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안 의사의 공판 통역을 담당하였 던 통감부 통역 소노기(園木末喜)의 1910년 3월 26일 안 의사 사형집행 결과 보 고 전문에서 옥중에 있으면서 기고한 유고 중 《전기》(안응칠역사)는 이미 탈고하였으나 《동양평화론》은 총론 및 각론의 일절에 그쳐 전체의 탈고를 보지 못하였다. 32) 라고 밝힌 내용도 안 의사의 저술 상황을 명백히 입증하는 대목이다. 이러한 안 의사의 유고는 안 의사 순국 후 극비로 취급되어 친족에게도 보이지 않고 즉시 압수하여 한국통치 자료로만 활용하였다. 그러므로 안 의사의 유고가 다시 햇빛을 보게 되기까지는 60년이란 세월이 30) 국가보훈처 편,《亞洲第一義俠 安重根》3,〈殺人犯被告人安重根聽取書〉, 633쪽.; 주3 함께 참조. 31) 典獄 栗原貞吉의 서한 (안중근의사기념관 소장). 32) 국가보훈처 편,《亞洲第一義俠安重根》3,〈安重根 刑執行에 관한 要領〉, 77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