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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하얼빈의거와 순국 100주년의 성찰 88 군사연구 제129집 것이었고, 제5회 때는 달갑지도 않은 일본인 관선변호사의 변론이 있었다. 그리고 2월 14일에 진행된 제6회 공판정에서는 마나베(眞鍋) 재판장의 판결로 끝을 맺었 다. 그 판결은 이미 일본 정부의 명령대로 안 의사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우 덕순에게는 징역3년, 조도선과 유동하에게는 각기 징역 1년 6개월이 선고되었 다. 22) 안 의사는 사형선고에도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는가”라고 반문 하면서 안색에 미동도 없이 의연한 자세로 일관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일제 관동도독부 여순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 어 순국하였다. 이보다 앞서 안 의사는 여순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도 다 시 살 수 있는 길일지도 모를 고등법원에 상고를 하지 않았다. 모친의 교훈과 안 의사의 결연한 뜻이었다. 단지 그동안 그가《안응칠역사》를 이어 집필 중이던 《동양평화론》을 완성하기 위해 히라이시(平石) 고등법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완 성까지 얼마간의 형 집행 연기를 희망해 승낙 약속까지 받았었다. 23) 그러나 그들 은 이 약속을 어기고 안 의사가 처음 원했던 천주교 사순일인 10월 25일이 순종 황제의 탄신일이 되어 한국민의 민심을 자극할까 염려하여 하루 넘긴 26일 오전 10시 전옥(典獄) 구리하라(栗原貞吉)와 미조부치(溝淵) 검찰관, 그리고 소노끼(園木) 통역 등 사형집행 관리들의 입회하에 감옥 내 교수대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24) 안 의사는 그 전날 고향에서 보내온 흰색 명주 한복으로 갈아입고 25) 조용히 무릎 꿇고 기도하였다. 전옥이 사형집행문을 낭독하고 최후의 유언을 물었으나 다른 말은 없고 “나의 이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결행한 것이므로 임석제원들 도 앞으로 한․일 화합에 힘써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라고 하며 “나와 함께 ‘동양평화만세’를 부르자”고 제의하였으나, 그들은 이를 저지하고 교수형 집 행을 감행하였다. 이때 안 의사는 ‘동양평화만세’를 불렀다는 말도 전하나 자료상 22) 만주일일신문사,《安重根事件公判速記錄》, 1910 참조; 안 의사의 여순공판이 대륙침략정 책을 추진하던 일본정부의 위장된 공판임을 근 년래 일본학자도 일부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中野泰雄교수는〈平和ノ使徒安重根ト東洋平和〉,《安重根義士 순국87주년 국제학술회의 보고서》, 안 의사 기념관, 1997에서 그 재판을 ‘公判이 아니고 曲判’이라고 표현하였다. 23) 안 의사의 平石고등법원장의 면담기록인〈聽取書〉(앞의 국가보훈처의《아주제일의협 안중근》3, 621~633쪽) :『安應七歷史』, 윤병석 편,『安重根傳記全集』, 128~129쪽. 24) 통역 園木末喜의 ‘사형집행전말보고서’;〈安重根의 最後〉《만주일일신보》1910년 3월 27일 자;〈안중근의 사형집행〉《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 28일자. 25) 두루마기와 윗저고리는 흰색이나 바지는 검은색으로 제조 되었다. 이 옷으로 갈아입고 순국 5분 전 촬영되었다는 안 의사의 최후 유영이 전래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