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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29집 83 그해 10월 들어 마침 이토가 러시아 대장대신 코코프체프와 만나 동양침략정책을 협상하기 위해 북만주를 시찰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겉으로는 이토가 아무 정치적 의도가 없는 만주지역 만유여행이라 하였지만 속내는 한국은 물론 만주와 몽골지배를 놓고 러일협상을 시도하려 한 것이다. 안 의사는 이때야말로 나라와 겨레의 원수를 갚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제의 대륙침략을 결사저지하 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13) 감연히 국내진공전 때의 전우인 우덕순(禹德淳) 과 같이 10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그 다음날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중 도에 중국과의 접경도시인 포그라니치나야에서는 안 의사의 동지인 유승렬의 아 들 유동하(劉東夏)를 통역으로 합류시켰다. 하얼빈에 도착한 안 의사 일행 3인은 그곳 국민회(國民會) 회장 김성백(金成 伯)의 집에 유숙하였다. 23일 아침 3인은 사진관을 찾아 의거결의 기념사진을 찍 고, 또한 안 의사와 동지로 연해주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하다 하얼빈에 거주하던 조도선(曹道先)을 찾아 합류하였다. 그날 밤 안 의사 일행은 심야까지 거사계획을 의논하고, 안 의사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대동공보(大東共報) 주필 이강(李剛)에게 현지에서 추진되는 거사계획과 자금조달에 관한 편지를 쓰고 우덕순과 연서하였다. 또한 안 의사는 의거결의를 읊은〈장부가(丈夫歌)〉를 짓고, 우덕순도〈거의가 (擧義歌)〉를 지어 이에 화답하였다. 24일 아침 안 의사와 우덕순, 그리고 조도선 은 의거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남행열차를 타고 채가주(蔡家溝)에서 하차해 역 구내 여관에서 숙박하였다. 25일 안 의사는 거사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채가구와 하얼빈 두 역에서의 거사계획을 세워 우덕순과 조도선이 채가구 거사를 맡기로 하고, 안 의사는 하얼빈으로 되돌아와 하얼빈 거사를 준비하였다. 김성백의 집에서 유동하와 그날 밤을 묵은 안 의사는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역사적인 거사일을 맞았다. 오전 7시경 유동하와 같이 하얼빈역에 간 안 의사는 연소한 유동하를 돌려보내고 단신으로 역 구내 찻집으로 들어가 이토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 동안 채가구역에서 먼저 거사를 계획했던 우덕순과 조도선은 러시 아 경비병이 수상하다고 판단, 이토가 탄 열차가 지나가는 시간에 구내 여관방에 갇혀 있어 거사의 기회조차 빼앗기고 그 다음날 체포되고 말았다. 13) 안 의사는 후일 여순옥에서〈天與不受反受其殃耳〉(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벌을 받게 된다.)라고 휘호하였다. 안 의사는 伊藤이 하얼빈에 올 것을 하늘이 준 기회로 확신하고 그를 포살 응징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