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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하얼빈의거와 순국 100주년의 성찰 82 군사연구 제129집 안 의사가 지휘한 의병부대는 박은식의 안중근전(安重根傳) 에 의하면 두만강을 건너 홍의동(洪儀洞)에서 일본군과의 첫 교전에서 승첩을 올린 후 세 차례에 걸쳐 50여명을 사살하였고 1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가 석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회령 남쪽의 영산(靈山) 대회전(大會戰)에서 중과부적으로 일본군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영산전투에서 패군지장이 된 안 의사는 우덕순․김영선․갈화천 등과 함께 12일 동안 단 두 끼의 요기만 하고 구사일생으로 두만강을 다시 넘었다. 연추로 귀환한 안의사는 피골이 상접하여 친구들조차 그를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안의사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그 이듬해인 1909년 3월 5일(단기 4242년 2월 7일) 연추 하리(下里) 마을에서 결사동지 김기룡(金起龍)․강순기(姜順琦)․정원주(鄭 元柱)․박봉석(朴鳳錫)․유치홍(劉致弘)․김백춘(金伯春)․백규삼(白奎三)․황병철 (黃丙吉)․조응순(趙應順)․김천화(金千華)․강창두(姜昌斗) 등 12명과 회동해 단 지동맹(斷指同盟)을 결행하고 ‘조국독립의 회복과 동양평화의 유지’를 위해 헌신 하는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각기 왼손 무명지 첫 관절을 한칼로 잘라 생동하는 선혈(鮮血)로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3창하였다. 또한 안 의사는 그 목적을 밝히는〈동의단지회의 취지문〉을 혈서하였다. 곧 회장 안 의사를 주장으로 한 동의단지회는 혈맹동지 12인 이 다같이 한 몸을 바쳐 조국의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결성 한 애국결사였다. 국망을 목전에 둔 1909년 초에 망명지 연해주 연추(煙秋)에서 단지동맹을 맺어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11)의 회장이 된 안 의사는 조국의 독립회복과 동양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삼인동맹[三(一二)人同盟] 보국혈심(報國血心) 범만주일(汎萬注一) 단석투금(斷石透金) 결의동맹(結義同盟) 보국안민(保國安民) 환난상구(患難相救) 사생동거(死生同居)”라는 신의지교(信義之交)를 토대로 회무를 주도하고 있었다. 12) 11) 안중근은 1907년 8월 망명 후 간도와 연해주에서 구국계몽운동과 의병합전에 헌신하여 1908년 6, 7월에는 국내 6진(六鎭)지역 진공작전까지 벌려 결사항전하였다. 그러나 會寧靈山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패전 후 연추의병 본영으로 돌아간 안 의사는 새로운 항전을 위하여 同義斷指會를 조직하여 조국의 독립회복과 東洋平和를 유지하기 위하여 殺身成仁하기로 斷指 誓天同盟하였다. 이와 같은 행적은 필자가〈安重根의 同義斷指會의 補遺〉《한국독 립운동사 연구》제32호, 2009. 4.에서 비견을 제시하였으므로 이 글에서는 생략한다. 12) 혈서 취지서를 작성하고 同義斷指會의 會長이 된 안 의사는 회무를 주도하였다. 동의단지회의 會友는 사생을 같이하기로 한 의병부대의 간부(李剛의 《내가 본 안중근의사》)라고도 하는 각지 의병의 대표를 뽑아 혈맹하였다. 단지동맹의 한사람인 趙應順의 “各地 各派로부터 揀拔하야 단지 同盟”이라 증언한 1921년 4월 2일자《독립신문》기사 기록도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