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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연구 10 군사연구 제129집 창의회(倡義會)와 더불어 동의회가 탄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이라 할 수 있다. 동의회의 주요 발기인은 안중근을 비롯하여 최재형(崔在亨)․이범윤(李範允)․ 엄인섭(嚴仁燮)․김기룡(金起龍)․이위종(李瑋鍾)․전제익(全濟益)․이승호(李昇 鎬)․백규삼(白圭三) 등이며, 주러공사 이범진(李範晉)의 아들 이위종이 부명(父 命)을 받고 1만 루블의 군자금을 가지고 연해주로 온 것이 동의회 결성의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1908년 4월경 연추의 최재형 집에서 동의회를 조직하기로 결의 하고 수백 명이 참가한 가운데 총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총장에 최재형, 부총장에 이범윤이 각기 선임되었고, 그 아래 회장에는 이위종, 부회장에 엄인섭이 각각 선 임되었다. 그리고 백규삼이 서기(書記)를 맡았고, 안중근을 비롯한 발기인 전원이 평의원(評議員)이 되었다. 총장제와 회장제의 역할 및 기능,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총장은 권위를 가진 상징적 역할을 하고, 회장이 회의 실제 업무를 관장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한편, 동의회의 군자금은 이위종이 소지하였던 1만 루불과 최재형이 사재로 출연한 1만 3천 루불을 비롯하여 수청지역 한인들이 모금한 6천 루불 등 총 2만 9천 루불에 달하였다. 3) 동의회는 이주 한인간의 결속도모와 환난구제를 표방하면서 결성되었으나, 실질적 으로는 항일의병을 추진하기 위한 결사의 성격이 강하였다. 곧 동의회라는 회명 자 체가 의병결사를 의미하였던 것이다. 동의회의 평의원이었던 안중근도 “(동의회의) 목적은 화난상구(禍難相救)에 있으나 동 회원에는 의병에 가담한 자가 많다.(이것이 동의회가) 의병단체라는 평을 타인으로부터 받는 소이이다.”라고 진술해 동의회가 곧 의병 단체의 성격을 가졌음을 시사하고 있다. 4) 그리고 동의회 취지서에서 우리는 어찌 하여야 우리 조국을 붙들고 동포를 건지겠는가. 금일 시대에 첫째 교육을 받아 조국정신을 배양하고 지식을 밝히며 실력을 길러 단체를 맺고 일심동맹 하는 것이 제일 방침이라 할지라. 그런 고로 우리는 한 단체를 조직하고 동의회라 이름함을 발기하노니 (중략) 저 독국(獨國-필자주) 비스마르크는 평생에 쇠와 피와 두 가지로써 독국을 흥복하고 부강을 이루었나니 우리도 개개히 그와 같이 철환을 피치 말고 앞으로 나아가서 붉은 피로 독립기를 크게 쓰고 동심동력하여 성명을 동맹하기로 청천백일에 증명하노니, 슬프다, 동지제군이여. 5) 3) 「官秘 제8호(1915년 5월 24일 접수)」‘排日鮮人 退露處分에 關한 件’(1915년 5월 17일 조선 총독 寺內正毅가 외무대신 加藤高明에 보낸 문서),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의 部 在西比利亞 5권. 4)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7 , 257․466쪽. 5) 해조신문 1908년 5월 10일자, 「同義會趣旨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