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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29집 81 병에는 유인석(柳麟錫), 홍범도(洪範圖)와 같이 국내에서 항쟁하다가 북상해 보다 장기적이며 효과적인 항전을 다짐하는 의병도 많았고, 박기만(朴基滿)의병 등과 같이 연해주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편성된 의병부대도 적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안 의사와 같이 국내외에서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다가 참여한 인물들도 있었다. 이와 같은 연해주의병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1902년 이래 간도관리사(間 島管理使)를 지내다가 러일전쟁 때부터 항일을 표방해 의병항쟁을 선도한 이범윤 (李範允)과 더불어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신망이 높고 재력도 겸비한 최재형(崔才 亨)도 의병의 독립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이를 선도한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 들의 노력과 열성으로 3~4천명으로 추정되는 의병부대를 편성해 연추에 국외의 병의 본영이라 할 ‘창의소(倡義所)’를 두고 조국 독립전쟁을 개시할 수 있었다. 이 의병부대의 모체를 처음에는 창의회(倡義會)라 불렀고, 뒤에는 동의회(同義會)라 고도 하였다. 회장에는 최재형, 부회장에는 헤이그밀사의 1인이며 주러시아공사 이범진(李範晉)의 아들인 이위종(李瑋鍾)이 선임되었으며, 총대장은 이범윤이 맡 았다. 이를 전후하여 안 의사를 비롯해 전재익(全在益)․김영선(金永善)․엄인섭 (嚴仁燮)․김기룡(金起龍)․우덕순(禹德淳) 등의 의병장이 이범윤 휘하에서 활동 하거나 또는 독립된 부대를 편성 활동하였다. 안 의사는 특히 동의회(同義會)가 모체가 된 연추의병대의 편성과 훈련 등에 발군의 활동을 보였다. 이들 연추의병은 일제와의 항전에서 비록 괄목할 만한 전과는 올리지는 못했지만 1개 사단이 넘는 일제의 소위 국경수비대의 경계망을 뚫고 국내진공작전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연해주의병이 전개한 국내진공작전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가 1908년 7월 연추 창의소를 출발, 두만강 하구에서 한, 중, 러 3국 경계망을 뚫고 함경북도 6진지역 으로 들어가 일본군과 수차에 걸쳐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때 안 의사도 2~3백 명 으로 추산되는 의병을 이끌고 최선봉에 서서 여러 차례 혈전을 벌였다. 이 의 병부대의 지휘체계는 여순공판에서 강원도 사람이라고 언급한 김두성(金斗星; 柳 麟錫 의병장의 변명인 듯)이 총독(總督)을, 이범윤이 총대장을 각각 맡았으며, 그 휘하에 성진 경무관 출신의 전재익(全在益)이 도영장(都營將), 엄인섭이 좌영장 (左營將), 안 의사가 우영장(右營將)을 각각 맡았다. 여기에 우덕순(禹德淳)․장석 회(張錫會)․김은수(金銀洙)․백규삼(白奎三) 등 여러 장교가 각기 한 부대를 이 끌었다. 안의사는 이러한 의병부대의 명칭을 뒷날 여순공판에서 ‘대한의군(大韓義軍)’ 이라 불렀고, 자신의 신분을 ‘참모중장(參謀中將)’ ‘특파독립대장’이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