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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29집 77 작성하는 등 치밀하게 조약 체결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주둔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그리고 이 조약 체결을 총괄 지휘하기 위하여 일제의 특파대사란 직명을 띠고 본국에서 급파된 이토 히로부미가 현지에서 주동하였다. 10) 이들은 광무황제를 위협하고 일제의 괴뢰정부로 전락하던 한국정부의 친일 대 신들을 앞세워 국제법상 유례도 없는 “을사5조약”을 강제로 늑결하려 하였다. 그 러나 최고 통치자인 광무황제는 끝내 이 조약을 인준치 않아 국제법적으로는 일 제의 일방적인 ‘선언에 그친 조약’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약의 파장 은 컸다. 이 조약을 빌미로 대륙침략정책을 선도하던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통감 (韓國統監)이란 직명을 띠고 내한하여 한국통감부를 차리고 식민지화정책을 강행 하였다. 영미를 비롯한 국제 열강이 일제에게 동조하여 한국은 실질상 외교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보호국’이란 허수아비 국가로 간주되고 말았다. 이는 곧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나 다름없으며, 미구에 명목상의 ‘합병’이라는 절차만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일제는 1907년 6, 7월에 이상설과 이준ㆍ이위종 세 특사의 헤이그 밀파를 구실 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늑결, 한국 내정에 대한 통치권 행 사의 법적 명분도 세웠다. 한국통감은 일본인을 차관 이하 고급관리에 임명할 수 있으며 모든 공문은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작성하게 되어 내정에서 실질상 일 제통치가 인정된 셈이다. 이 조약의 체결에는 을사5조약의 인준을 끝내 거부하였 던 광무황제가 동의할 리 만무하였고 ‘대리청정(代理聽政)’의 명이 왜곡 이용되어 부득이 제위에 오른 무위무능한 융희황제가 이를 저지시킬 수 없는 군사폭력적 위협 하에서 강제 늑결되었던 것이다. 이토는 그 공으로 본국정부로부터 후작(侯 爵)에서 공작(公爵)으로 승봉되었다. 일제는 이 조약과 아울러 비공개를 전제한 조약의 부속 각서(覺書)의 형식을 빌려 ‘군대해산’의 동의를 얻어 그해 8월 초에 강제 군대해산의 근거를 만들었다. 결국 정미7조약은 외교권 상실, 일제의 보호국이 된 을사5조약에 이어 내정권을 일제 통감부에 넘겨 한국정부를 명의만 남은 허수아비 정부로 전락시킬 명분을 제공한 셈이 되었다. 더구나 정미7조약의 부속 각서는 호국의 간성인 군대를 10) 윤병석,〈乙巳5조약의 신고찰〉《근대한국민족운동의 사조》, 집문당, 1996, 163~186쪽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