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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29집 65 V. 맺 음 말 이상에서 필자는 ‘안중근의 군인관의 형성과 전개’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 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것으로 이글을 정리하고자 한다. 안중근은 상무정신이 가득 찬 가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학문을 통해 세속적으로 출세하기보다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갖추는데 집중하였다. 특히 그는 동학과의 대립에서 무인기질을 발휘하여 삶의 터전인 청계동을 지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가 청소년기에 “친구와 의(義)를 맺는 것(親友結義),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飮酒歌舞)”, “총으로 사냥하는 것(銃砲狩獵), 날랜 말을 타고 달리는 것(騎馳駿馬)”을 즐겼다는 데서 그의 군인으로서의 기질을 엿볼 수 있다. 천주교의 수용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성장의 토대가 되었다. 이는 무인기질과 조화를 이루는 수준 높은 정신세계를 갖추게 된 기반이 되었고 세계 사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는 면에서 매우 의미 있다. 이후 안중근은 단순한 군인을 넘어 문무과 구비된 진정한 군인관을 형성하고 구현하는데 목숨을 바쳤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그였기에 러일전쟁의 와중에 무력 투쟁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외교적 환경조성을 목적으로 한 해외독립기지건설이라 는 원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에는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운영하고 설립하여 문무가 겸비된 인재를 기 르는데 진력하였고, 일제의 침탈이 강화되자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한 하야시를 처 단하려고 하였다. 또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그는 서북학회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 등 국망에 적극 대응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1907년 고종의 퇴의, 군대해산 등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그는 1904년에 구상했 던 해외독립기지건설 구상을 다시 실현하기 위해 간도로 망명하여 이후 노령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가 의병활동과 재판을 통해 ‘단합의 중요성’, ‘조국애와 지 휘 관의 조건’, ‘전쟁의 명분과 의병(군인)의 자세’, ‘적 제압 논리’라는 군인관과 군 인의 자세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박은식은 진정으로 문약에 빠진 한국의 한계를 일거에 극복하고 나라를 수 있는 상무정신의 모델로, 계봉우는 대무가(大武家)로 평가는 등 한국근대 군대의 시조로 평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도 임진왜란에서 중국을 구한 이순신과 전쟁영웅인 가리발리 등 세계적인 군인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평가하였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