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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연구 8 군사연구 제129집 Ⅰ. 머 리 말 하얼빈의거를 결행한 안중근의 신분은 ‘의병(義兵)’이었다. 1907년 가을, 러시아 연해주 망명 이후 그는 연해주의병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는 창의회(倡義會)와 더불어 연해주의병의 양대 세력 가운데 하나였던 동의회(同義會)에 참여하여 활 동하였다. 1908년 7월 연해주의병이 관북지방으로 진공작전을 결행할 때, 도영장 (都營將) 전제익(全濟益), 좌영장(左營將) 엄인섭(嚴仁燮)과 더불어 그는 우영장 (右營將)의 직책을 띠고 있었다. 이때 그는 한 달 반 동안 관북지방 각지를 전전 하면서 일제 군경을 상대로 혈투를 벌인 뒤 연해주로 귀환하였던 것이다. 2년간에 걸친 의병투쟁을 통해 축적된 항일전의 역량은 1909년 10월 26일 하 얼빈 역두에서 대한침략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처단한 하얼빈의거로 승화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었던 까닭에 안중근은 하얼빈의거 후 신문, 공판석상에서 자신의 신분을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參謀中將)으로, 자신이 결행한 의거를 독립전쟁-의병전쟁-으로, 나아가 이등박문을 처단한 것은 독립전쟁 과정에서 올린 전과였다고 당당히 천명할 수 있었다. 안중근이 결행한 하얼빈의거를 한 개인의 거사가 아니라, 청일전쟁 이후 1895년부터 시작된 의병 전쟁의 결실로 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안중근이 맹주가 되어 결성한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는 그의 의병투쟁 과정에서 볼 때 1908년 여름의 국내진공작전과 1910년 10월 하얼빈의거의 중간 道程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므로 동의단지회는 안중근의 의병투쟁, 특히 하얼빈의거의 실 상을 해명하고 그 역사적 의의를 설정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학계에서는 그동안 동의단지회의 실체를 해명하기 위한 작업 이 지속되어 왔다. 1)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1) 동의단지회는 종래 단지동맹으로 일반적으로 호칭되어 왔다. 그동안 단지동맹 사실만 언 급되어 왔고, 여기에 대해 밀도있는 선행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최근에 와서이다. 그 가운 데서도 독립운동사학계의 원로인 윤병석 교수가 단지동맹의 정식 회명이 ‘동의단지회’라는 사실을 밝힌 것을 비롯해 결성 시기 및 장소 비정문제, 회원 분석, 취지 구명 등을 시도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안중근의 연해주 의병운동과 동의단지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4,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0; 「안중근의 동의단지회의 補遺」,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32, 2009). 이러한 선행연구 성과는 본고의 작성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최근에는 또 동의단지회의 명칭을 正天同盟으로 보아 안중근의 천주교 신앙심과 연결시 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신운용, 안중근과 한국근대사 , 채륜, 2009) 여러 정황으 로 보아 수용하기 힘든 주장이라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