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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군인관의 형성과 전개 60 군사연구 제129집 다. 전쟁의 명분과 의병(군인)의 자세 안중근은 의병전쟁 과정에서 일본군인과 상인 등을 포로로 생포하였으나 만 국공법에 입각하여 이들을 석방하였다. 56) 안중근은 적군과 민간인을 구별해야 한 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전쟁도 국제법에 따라 수행해야 정당성이 있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그는 적국의 국민마저 아국의 편으로 만들 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인식했다. 여기에서 안중근의 일본과 만국공법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안중근은 일본인들과의 솔직한 대화를 통하여 일본인 중에서도 이토의 대한 정책 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면에서 의미 있는 대목이 다. 57) 말하자면 이 무렵의 일본인과의 대화경험은 안중근이 일본을 보다 분석적 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기회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가 사 형선고를 받고도 “일본국 4천만 민족이 안중근의 날을 크게 외칠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58)는 선언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후자의 경우에서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 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는 만국공법을 반일투쟁의 방법론으로 인식한 시대적 분 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서울진입작전을 계획한 이인영(李麟榮)은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면서 의병을 국제공법상의 교전단체로 인정하고 의병투쟁의 정당성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통문을 각국 공사관에 보냈다. 59) 바로 안중근의 일본포로 석방은 1907년 12월에 결성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정책과 접점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포로를 풀어준 것에 불만을 품은 의병들을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 적들이 그같이 폭행하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들이 다 함께 노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들마저 야만의 행동을 하고자 하는가. 또 일본의 4천만 인구를 모두 다 죽인 뒤에 국권을 도로 회복하려는 계획인가. 저쪽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기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약하고 저들은 강하니, 악전 (惡戰)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충성된 행동과 의로운 거사로써 이등의 포악한 56) 안중근,「안응칠역사」, 189~190쪽. 57) 안중근의 일본관은 신운용, 「안중근의 대일인식」,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0, 한국민족운동 사학회, 2009. 58) 안중근, 「안응칠역사」, 180쪽. 59) 장석흥, 「국외의 망명과 의병운동의 전개」, 92~9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