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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군인관의 형성과 전개 54 군사연구 제129집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밖에 나왔다가 男兒有志出洋外 큰 일을 못 이루니 몸 두기 어려워라 事不入謨難處身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서하고 望須同胞警流血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말게. 莫作世間無義神 40) 그러던 중 어느 노인의 도움으로 지친 몸과 정신을 회복하여 겨우 연추로 돌 아와 윤주사(尹主事)의 집에서 약 10일간 요양하였다. 그 후 안중근은 블라디보스 톡으로 귀향 하자, 블라디보스톡의 한인들은 안중근의 의병투쟁을 환영하는 모임을 가졌다. 41) 이는 의병전쟁이 한인사회 속에서 그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2. 정천동맹과 의거 의병전쟁에서 돌아온 안중근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쳐왔다. 러시아의 압력과 의병의 물적 정신적 기반이 되었던 최재형 등 노령한인사회가 의병활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고 심지어는 매도하는 하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42) 이러한 상황변화 속에서도 안중근은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 했다. 동시에 이는 안중근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자 기회였다. 우덕순과 공립협회의 블라디보스톡 지 부에서 함께 활동을 하면서 43) 안중근은 1909년 1월경 박춘성(朴春成)․한기수(韓 起洙) 등 3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수청에서 연추지역으로 이동하는 등 지속적으 로 의병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안중근의 추종세력이 있음을 알 수 있 다. 44) 이는 독자적인 그의 세력이 형성될 가능성을 열어 놓는 대목이기도 하다. 안중근은 의병세력의 분열과 한인사회의 의병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일변시켜 대일투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단체조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었다. 이는 안중근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의 생각에 동의한 길길량․김지창 등이 “우 리 한인들이 일심단체하여 동종을 상보하며 아무쪼록 문명에 인진(引進)하여 외 국인의 수모를 면케 하고 우리 동포 중에 아편을 엄금할 것”이라는 창단 목적 45) 40) 안중근, 「안응칠역사」, 194쪽. 41) 안중근, 「안응칠역사」, 168쪽. 42) 신운용, 위의 논문, 159〜160쪽. 43) 이상봉․이선우 편, 李鎭龍 義兵將 資料全集 , 국학자료원, 2005, 68쪽. 44) 신운용, 위의 논문, 161쪽. 45) 대동공보 1909년 3월 17일자, 「취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