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page

특 집 군사연구 제129집 53 그러나 홍의동에서 척후병을 사살한 사실이 곧 일본군에 알려졌다. 일제의 동부 수비군 사령관 마루이(丸井) 소장은 회령․웅기․경원 등의 각 일본 수비대에 서 로 책응하여 의병부대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일본군의 추적을 당한 안중근은 도 영장 전제익과 상의하여 지형에 익숙한 무산방면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부대장 김모와 참모장 오내범이 이끄는 의병대는 7월 10일 오전 4시경의 경흥 군 신아산 전투에서 일본군을 경흥으로 몰아내고 일본군 하사 이하 5명의 행방불 명과 1명의 사살이라는 전과를 올렸다. 38) 연해주 의병부대의 대표적 승첩으로 평가되는 홍의동․신하산 전투는 의병의 사기를 드높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일제는 10일 저녁 무렵 보병 제49연대 제9중대를 파견하였고 경성(鏡城)에서 온 70여 명의 지원군이 웅 기를 걸쳐 경흥으로 출동하자 의병부대는 회령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안중근은 전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회령 온성 방면에서 김모(金某, 이범윤 의 部將)와 전제익에게 합병(合兵) 권유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서로 대장이 되려 고 하여 합병은 결렬되고 말았다. 7월 16일 경성의 미하라 중좌(三原中佐)가 회령 을 향해 출발하여 의병부대를 추적하자 7월 19일 회령군 영산사 창태평에 있던 안중근 부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후, 안중근은 일본군과 산발적인 교전을 하면서 산간 밀림의 폭우 속에서 밤을 보냈다. 흩어진 병사를 모았으나 60~7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전투로 지쳐 있었고 군기도 서지 않았다. 이때 그는 의병의 현실을 보고서 창자가 끊어지고 간담이 찢어지는 것 같이 괴로워했다. 이후 안중근은 의병을 재정비하여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또 다시 대오는 흩어지고 말았다. 이때 그는 우왕좌왕하는 손(孫)․김(金) 두 부 하에게 임전무퇴의 군인정신을 강조하였다. 39) 그리고 스스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부하들을 격려하였다. 38) 러시아의 기록에 따르면 7월 10일 의병부대는 64명 사살, 부상자 30명의 전과를 올린 데 반해, 아군의 피해는 참모장 오내범이 부상을 당하는 등 부상자가 겨우 4명뿐으로 피해는 경미하였다고 한다(국사편찬위원회, 「연해주의 군총독 각하께」,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4, 30쪽). 물론 이 기록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으나 의병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음은 분명하다. 39) 국사편찬위원회, 「친 제28호」,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 47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