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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29집 49 국권을 회복할 수 없음을 절실하게 느낀 안중근은 뭔가 다른 방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25) 교육운동으로는 국권회복이 불가능하고 보다 강력한 행동이 필요함을 깨 달은 그는 한국인들이 이토의 정책에 찬동하지 않고 있으며 일본의 한국보호정책 의 허구성을 폭로할 목적으로 거병을 결심하였다. 26) 그리하여 그는 본격적으로 국권회복의 방안으로 무력투쟁 즉 의병전쟁으로 전환하였다. 물론 이러한 결심은 국가위기 때마다 등장하는 그의 상무적 기질의 발현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그가 1904년 구상한 하야시와 부일세력 처단계획은 개별적인 협력을 전제로 한 것이었고, 또한 1905년 해외에 망명하여 외교와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해외기지건설구상도 생각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이와는 달리 1907년 간도에서의 결심은 국권회복의 방안으로 “거병밖에 없다”는 확신 위에 노령지역의 의병세력과 광범위한 연대를 기반으로 하였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27) 안중근은 10월 말경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며 엄인섭․김기룡과 의형제를 맺는 등 활동공간을 넓혀갔다. 11월 그 는 노령 의병의 중심세력을 이끌고 있던 이범윤을 만나 “이토가 극악해져서, 위 로는 임금을 속이고 백성들을 함부로 죽여 신의를 버리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 를 위협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역천한 자이므로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일본을 치 는 것은 천명이다” 28) 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안중근이 거병을 ‘천명(天命)’에 근거하여 설명하고 있는 점은 그의 사상성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대목이다. 29) 이는 대일항쟁의 이론적 근거를 천명론에 두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거병이 단순히 외적에 대한 의병으로서의 의무를 넘어 하늘의 절대적 명령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만일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니 25) 이는 다음의 사료에서 볼 수 있다. “또 나는 間島의 同胞를 視察하는 한편 民智 開發을 꾀할 생각이며 義兵을 일으킬 생각은 毛頭 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同地에서 內地 의 形勢를 보니 날로 同胞는 不幸에 빠질 뿐이므로 不得已 義兵을 일으켜 天下를 向해 伊藤이 韓民을 壓制하는 것을 公表하고 한편으로는 日本 皇帝에게 伊藤의 政略에 韓民이 滿足하고 있지 않음을 알리고 韓民이 日本의 保護를 願한다는 것은 事實이 아니라는 뜻 을 呼訴하려는데 있었다”(국사편찬위원회, 「境경시의 신문에 대한 안응칠의 공술(제1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7, 394쪽.) 26) 신운용,「안중근의 의병투쟁과 활동」,『안중근과 한국근대사』, 127쪽. 27) 위의 논문, 128쪽. 28) 안중근, 「안응칠역사」, 168〜169쪽. 29) 신운용, 「안중근의거의 사상적 배경」, 한국사상사학 25, 한국사상사학회, 2005,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