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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군인관의 형성과 전개 48 군사연구 제129집 Ⅲ. 상무정신의 실천 1. 의병전쟁과 군인정신 안중근은 1907년에 들어와 국내 활동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었다. 그리하여 그는 1905년에 계획했던 해외기지건설계획을 다시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실 천하기 위해 안중근은 1907년 3월경 빌렘신부를 만나 해외기지건설계획을 상의하 려고 하였다. 그러나 빌렘신부는 교육에 의한 구국운동을 고집하여 안중근과 마 찰을 빚었다. 또한 동생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안중근은 이 계획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서울로 상경하여 독립운동가들과 교분을 다지면서 향후 방략을 모색하였다. 1907년 7월은 한국근대사의 크나큰 격변기였다. 7월 18일 고종의 퇴위, 7월 24일 정미7조약, 7월 27일 결사금지를 강제한 보안법 발표, 8월 1일 한국군대 해산 등 일제의 침략정책이 더욱 노골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안중근은 1905년에 구상했던 해외독립기지건설계획을 구체화하려는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 였다. 그리하여 1907년 8월 1일 서북학회의 요인인 김달하의 아들 김동억과 함께 경성을 출발하였다. 일설에 김달하는 안중근에게 만주망명을 제안한 김진사라는 주장이 있다. 24)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의 간도행은 개인자적으로만 볼 수 없는 서북학회 등의 세력과 일정한 연관관계 속에서 추진된 계획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경성을 출발한 안중근은 부산초량 객주가에서 하루 이틀 머문 후 신호환(神戶 丸)으로 원산에 도착하였다. 이후 9월 10일경 간도에 도착하여 천주교인들이 많 이 사는 불동(佛洞)의 천주교인 남(南)회장 집에 여장을 풀었다. 간도에서 용정 등을 시찰하면서 이상설이 세운 서전서숙을 방문하였으나 이상설은 이미 헤이그 로 떠났다. 간도에 왔을 때만 해도 안중근은 구국방책으로 계몽운동에 입각한 교육사업을 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8월 23일 간도에 간도파출소를 설치하는 등 일제의 간도에 대한 장악력이 강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육으로만 24) 오영섭, 「간도지역 독립운동과 안중근이 지도한 의병전선」, 동북아평화와 안중근의거 재 조명 , 안중근 하얼빈학회․동북아재단, 2008, 1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