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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29집 47 그러나 해외기지건설계획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안중근은 르각신 부의 조언에 따라 교육사업에 진력하였다. 안중근이 교육을 구국의 방책으로 삼 은 것은 천주교대학건립시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민족관과 국가관이 투철한 안중근은 한국인을 선교의 대상으로만 여긴 천주교 상층부와 본 질적으로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교육사업에 뛰어들어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돈의학교를 운영하였다. 삼흥학교에서 안중근은 영어를 가르치며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 다. 외사경찰인 순검 정씨가 비번이면 자진하여 상무정신을 기르기 위해 학생들 에게 체조를 가르친 22) 돈의학교는 1908년 9월 15일에 평안도와 황해도의 80여 학교에서 온 3천여 명의 학생들과 교사 등 학교관계자 1천여 명이 참가한 운동회 에서 3등을 차지하는 성과를 올렸다. 23) 이처럼 안중근이 문무의 조화를 추구한 사실은 그를 평가함에 있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안중근은 군인의 신분으로 이토를 처단하였다. 하지만 그 는 평범한 군인이 아니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그는 목숨을 던져 이또를 처단함으로써 식민지로 전락하는 한국을 건져 올리려고 하였다. 또한 그 는 한국과 세계를 동일한 운명체로 여겨 한국의 멸망을 곧 세계의 멸망으로 여겼 다. 때문에 그는 당시 풍미하던 제국주의 시대를 평화의 세계로 격변시키기 위한 이론인 동양평화론의 완성에 죽는 그 순간까지 매달렸다. 그러므로 그는 과거를 지나 이 시대를 관통하여 한국과 세계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동양평화론을 제 창한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다. 이처럼 그는 한국군의 이상적인 군인상이라고 할 수 있는 “문무를 겸비한 군인”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민족의식이 1907년 3월 경 간도망명 결심을 듣고 만류한 빌렘신부 에게 “종교보다 국가가 더 중요하다”고 한 선언에서 얼마나 확고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의 민족의식은 곧 국가의식으로 이는 국가의 안위를 가장 중요한 존재이유 로 삼는 군인의식과 일맥상통하다. 그러므로 그가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 토를 처단하였다고 주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22) 경향신문 1907년 7월 20일자, 「雜報」. 안중근이 가입한 서우학회의 취지서에서도 그 창립 목적을 “我同胞靑年의 敎育을 啓導勉勵야 人才를 養成며 衆智를 啓發이 卽是國權을 恢復고 人權을 伸張 基礎라”고 강조하였다(아세아문화사, 西友 제1호, 1978, 1쪽). 돈의학교에서 체육이 강조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23) 조광, 「安重根의 愛國啓蒙運動과 獨立戰爭」, 7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