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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군인관의 형성과 전개 46 군사연구 제129집 여기에서 안중근이 구체적으로 일제를 응징할 무력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착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무력대응’을 기울어져가는 국가를 살릴 수 있는 중요 한 방안이라고 확고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처럼 시대상황과 연동되어 구체적으로 표출되던 상무정신은 그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에너지원이 되었다는 사실에 특 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러일전쟁의 발발 무렵 안중근의 국제정세 인식과 그 해법도 그의 상무정신 과 관련하여 큰 의미를 갖는다. 안중근은 러일전쟁에서 어느 나라가 승리하든 한국 이 큰 위험에 빠질 것으로 보았다. 그 해결방안으로 그는 해외에 국권을 회복을 위 한 기지 건설이라는 야심찬 계획을 구상하였던 것이다. 이는 한국에 유리한 외교적 환경을 조성한 다음 결정적으로 무력으로 주권을 회복하자는 포석이었다. 19) 이러한 해외기지건설계획을 갖고서 상해로 가서 민영익의 집을 방문하고 상인 서상근을 만났다. 특히 그는 서상근에게 “만일 국민이 국민된 의무를 행하지 아 니 하고서 어찌 민권과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오” 20)라고 하면서 “지금은 민족 세계인데 어째서 홀로 한국 민족만이 남의 밥이 되어 앉아서 멸망하기를 기다리 는 것이 옳겠소” 21)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민권 의 회복을 국민의 의무라고 확신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세계를 ‘민족’을 중심으로 인식하였다. 이처럼 정립된 그의 강렬한 민권․민족의식을 갖고 있었다. 상경니 이  한일간에 즁대 문뎨가 층텹츌할 이라 보안회가 창셜되엿거 안 즁근이 그 회에 입참코져 야 그 회 회쟝을 차져가 보니 시국를 담론더니 그 회쟝 이 목뎍을 무르 안즁근이 답기를 내가 림권조를 버히려고 쟝뎡 이십명을 쥰비엿 으니 회즁에서 삼십명만 츌여 도합 오십명으로 결를 조직면 림권조 죽이기 여반쟝이라  회쟝이하가 모다 묵묵부답 안즁근이 박쟝대쇼며 말하기를 버러지 흔 인이 여러 천명의 두령 노릇을 엇지리오 고 즉시 치고 니러나셔”( 大韓每 日申報 1909년 12월 3일자, 「안중근력」). “明治三十八年(一九0五) 新條約 締結時 京城 으로 나가 儒生 等이 創設한 保安會(協約 反對를 目的으로 組織한 것)에 가서 그 會의 首領을 찾아가 該會의 注意 方針을 따지고 그 不振함을 罵倒하고 또한 말하기를 나에게 지금 決死의 部下 五十名이 았다. 만약 保安會에서 決死隊 二十名을 모아 我와 일을 같 이 하게 된다면 京城에 있는 日韓 官吏를 屠殺하고 나아가 日本으로 건너가 日本當務者 를 暗殺하여 그 壓迫을 免케 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쉽다고 말했으므로 同會 首領이 이를 叱責하고 放逐한 일이 있다고 한다”(국사편찬위원회, 「헌기 제2634호」, 한 국독립운동사 자료 7, 243쪽). 19) 신운용,「안중근의 민권․민족의식과 계몽운동」, 101〜104쪽. 20) 안중근, 「안응칠역사」, 154쪽. 21) 위와 같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