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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29집 45 안중근은 안태훈이 1904년 4월 20일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청국 의사 서원훈 에게 ‘구타’를 당하였다는 소식을 친구 이창순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이창순과 함 께 서원훈을 찾아갔더니, 이들을 위협하는 서원훈을 안중근이 총으로 제압하였다. 이후 안중근은 서원훈을 고발하였으나 14) “외국인을 재판할 수 없다”는 법관의 말 을 듣고 귀가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5․6일 후 서원훈이 자객을 보내어 이들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하였다. 안중근은 무사하였으나 15) 오히려 서원훈은 진 남포 청국영사에게 고소하여 청국순사 2명과 한국순검 2명이 그를 체포하려고 하 였다. 7월경 서울 등지로 도피 하여 무사할 수 있었던 안중근은 이하영 등에게 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사건은 다시 진남포재판소에 환부되어 안중근에 게 무죄판결이 선고되었다. 16) 특히 이때 그가 “청나라 의사의 행위가 이와 같을진대 우리 백성의 생명을 어 찌 지킬 도리가 있겠는가(如淸醫之所爲면 我韓民生이 豈有支保之道乎잇가)” 17)라 고 부르짖은 사실에서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강렬한 의식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하는 그의 상무정신에 기반하 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유지라는 역사문제의 해결과 관련하여 안중근의 상 무정신이 직접적으로 발현된 사건은 ‘하야시 곤스케 대리공사와 부일파의 처단 계획’이었다. 러일전쟁 와중인 1904년 6월 일제는 한국침략을 더욱 노골화하여 황 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심상진(沈相震) 등이 보안회를 조직하였다. 안중근은 서원훈과 법적 분쟁을 벌이면서도 일제의 본격적인 침탈에 정면으로 대응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보안회를 찾아가 장정 20명을 준비 하였으므로 보안회의 장정 30명과 함께 하야시를 제거하자는 제의를 하였다. 그 러나 이를 거절하는 보안회를 책망하는 것에 머물고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18) 14) 서울대규장각, 外部訴狀 , 2002, 551~552쪽 15) 국사편찬위원회, 각사등록 제25권(황해도편 4), 1987, 427쪽. 16) 국사편찬위원회, 「헌기 제2634호」,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7, 243쪽. 17) 서울대규장각, 外部訴狀 , 552쪽. 18) 이는 다음의 사료에서 엿볼 수 있다. “로난 쳥인 일명이 긔의 부친과  다토다가 쥬목으로 챠며 발노 차고 갓 즁근이 산영고 집에 도라와셔 그 말을 듯고 분긔를 지 못야 그 쳥인을 가 안악군 등디에 맛나 총을 노와 죽이고 인여 피신 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