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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군인관의 형성과 전개 42 군사연구 제129집 품계를 받았으며 안인필(安仁弼)도 중앙 군사조직 오위(五衛)의 정6품 군직인 사 과를 지냈다. 안중근의 조부 안인수(安仁壽)도 무반 명예직 종6품 진해현감을 지 냈고, 안중근의 백부 안태진(安泰秦)도 해주부의 무반직인 군사마였다. 박은식과 함께 황해도 신동으로 평가받는 3) 안중근의 부 안태훈 4)은 특히 삼비 팔주(三飛八走)라는 유명한 11명의 한 사람이었을 정도로 뛰어난 문장가였다. 5) 안태훈에게서는 문장가뿐만 아니라, 한고조가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건국할 때 애용한 병법서인 황석공(黃石公)의『소서(素書)』구절을 벽에 붙여 놓고 즐겨 암 송했다는 일화에서 6) 병법가로서의 면목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안태훈의 무인기 질은 포수를 집에서 양성하였다는 점, 황해도지방의 동학을 진압하였다는 점에서 도 잘 드러나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안중근은 상무기풍이 농후한 가문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때문에 그에 게서 볼 수 있는 무인기질은 이후 전개된 의병전쟁과 이토 처단의 중요한 배경이 었던 점도 안중근의 전체상을 이해는 데 중요한 대목이다. 안중근의 무인기질은 그의 어린 시절 학문에 힘쓰지 않아 부친의 명예를 훼손 하고 있는 친구들의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한 데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네 말도 옳다. 그러나 내 말도 좀 들어보아라. 옛날 초패왕 항우(楚覇王項羽)가 말 하기를 『글은 이름이나 적을 줄 알면 그만이다』라 했는데 만고영웅 초패왕의 명 예가 오히려 천추에 남아 전한다. 나도 학문 가지고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고 싶지 는 않다. 저도 장부요, 나도 장부다. 너희들은 다시 더 나를 권하지 마라. 7) 위의 일화에서 안중근은 학문으로서 세상에 이름을 날리려는 생각을 갖고 있 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물론 한 측면에서 가문의 상무적 기풍이라는 점에서 설명될 수 있고, 다른 측면에서 안태훈이 중앙무대의 박영효 일파의 일원 3) 박은식,「白巖朴殷植先生略曆」,『朴殷植全書』下,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75, 286쪽. 4) 오영섭은 안태훈이 과거합격자를 기록한『사마방목』에 나오지 않고 그의 동생인 안태건 (安泰件)이 1891년 사마시에 합격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개화파에 속한 그가 갑신정변에 관여했던 전력과 민씨척족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동생 안태건의 이 름으로 과거를 본 사정으로 안태건의 이름이 등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면 이러한 주장은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공문서에 안태훈을 진사라고 기록한 것을 보건데 이러한 주장은 좀 더 엄밀한 연구를 필요한 과제이다. 5) 김구 저, 도진순 주해,『백범일기』, 돌베개, 1997, 58쪽. 6) 위의 책, 58쪽. 7) 안중근,「안응칠역사」(최이권 편역,『愛國衷情 安重根 義士』, 법경출판사, 1990), 7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