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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군인관의 형성과 전개 40 군사연구 제129집 Ⅰ. 머 리 말 올해는 안중근 순국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안중근에 대한 연구는 상 당히 축적되었다. 안중근은 사상가, 종교가, 교육가, 계몽가, 대시가, 서예가, 대여 행가 등으로 평가되었다. 1) 안중근의 삶은 그의 종교를 때어놓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특히 그는 역사문제의 해결을 신의 명령(천명)으로 여겼고 그 명령을 따르 는 것을 신자의 의무로 생각하였다. 독립을 무조건 유지하는 것이 일제의 침략에 직면해 있던 한국의 역사문제였다.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역사의 단절과 비극을 초래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안중근은 이러한 역사문제를 천명으로 여기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담보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했던 것이다. 안중근의 위대성은 한국을 넘어 세계의 평화 유지를 역사문제이자 천명으로 여겼다는 사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한국의 운명을 세계의 그것과 일치시켰 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면에서 그는 천명을 실천하였기에 천당에 간다고 굳게 믿 었던 것이다. 안중근은 또한 교육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한국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은 교육에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을사늑약이라는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구국의 방책을 궁리하였고, 그 결과 삼흥학교를 설립하였고 돈의학 교를 운영하였다. 특히 삼흥학교에서 영어를 중점으로 가르쳤다는 것은 세계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려는 의지를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유일한 한국근대의 계몽가였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계 몽’ 또는 ‘개화’라는 의미는 서양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한국근대 계몽가들은 근대 화를 서양화라고 생각하였고 일본을 서양화의 모범으로 여기고, 일본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 한국에 정착시키는 것을 문명국으로 가는 길로 여겼다. 그 근저 에는 자국문화에 대한 철저한 경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안중근은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론에 경도된 근대한국의 계몽가들 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오히려 그는 일본을 계몽할 대상을 보았던 것이다. 그에게 1) 계봉우는 안중근을 상무가(尙武家), 대종교가, 대교육가, 대시가, 대여행가, 사군이충(事君 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라고 평가하였다(계몽우, 「만고의사 안중근전」, 권업신문 1914년 6월 28일자ㆍ7월 5일자ㆍ7월 12일자ㆍ7월 19일자ㆍ 7월 26일자ㆍ8월 2일자ㆍ8월 9일자ㆍ8월 16일자ㆍ8월 23일자ㆍ8월 29일자,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