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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연구 36 군사연구 제129집 (국문초록) 안중근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연구 - 박 민 영 -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대한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처단한 안중근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약한 의병 지도자였다. 그는 1908년 휘하 의병 200명을 이끌고 함북지방으로 진출하여 일본군과 수십 차례 혈투를 벌였다. 이어 그는 1909년 2월 26일 동지 11명과 함께 왼손 무명지를 끊고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였다. 이 결사는 투쟁여건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의병결사인 동의회의 취지와 정신을 계승하여 인심단합을 통해 조국독립과 동양평화에 더욱 매진할 목적으로 결성한 단체였다. 동의단지회는 맹주 안중근이 나머지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결성한 것이다. 안중근이 진술한 동의단지회 12명 회원 가운데 실명으로 확인되는 인물로는 맹주 안중근을 비롯하여 백규삼(白圭三)․김기룡(金起龍)․강순기(姜舜璣)․조응순 (趙應順)․황병길(黃炳吉)․강창두(姜昌斗)․갈화천(葛化天) 등 8명이며, 나머지 정원주(鄭元柱[周])․박봉석(朴鳳錫)․유치홍(柳致弘)․김백춘(金伯[海]春) 등 4명은 현재로서는 실명을 확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안중근이 동의단지회를 결성한 것은 연해주 한인사회를 순방하면서 자신이 역설한 단결과 화합의 증좌(證左)를 제시하기 위해, 나아가 한국독립을 이룩하는 데 헌신한다는 빙거(憑據)를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곧 동의단지회는 의열투쟁을 결행할 목적하에서 결성된 단체가 아니라, 조국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굳은 결심을 나타내기 위해 결성한 단체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동의단지회에서 보여준 자기 희생적 실천의지는 곧 하얼빈의거를 결행할 수 있게 한 동력으로 작용하게 되었 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 안중근, 동의회, 창의회, 동의단지회, 연해주의병, 영산전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