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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사 사 / 기 타 군사연구 제129집 237 (국문초록) 효종의 북벌정책과 나선정벌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재검토 - 윤 호 량 - 병자호란의 패배로 청나라에서 8년간의 인질생활을 경험한 효종은 왕위에 오른 후 인조의 대외정책인 ‘崇明反淸’에서 한 단계 진전된 청나라를 공격하는 ‘北伐政策’을 추진하였다. 청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강한 군사력이 보장되어야 했다. 하지만 ‘적장자 상속’이라는 정통성 없이 왕위에 오른 효종은 취약한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훈련도감, 수어청, 어영청의 중앙군과 금군이라는 자신의 친위군 위주로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청나라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의 삼남 지방에만 군사들을 전문적으로 훈련시키는 영장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던 중, 러시아와 청나라 사이의 국경분쟁이 발생하였고 청나라에서는 조선 에 병력 파병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은 두차례에 걸쳐 100~200명의 포수를 파병하였다. 사격술이 뛰어났던 조선의 포수들은 청나라와 연합하여 러시아군을 물리쳤는데, 우리는 이 사건을 나선정벌이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나선정벌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 같은 대규모의 전쟁이 아니었고, 실제 전투가 일어난 기간도 하루나 이틀에 불과한 단기전이었다. 그리고 당시 파병된 병력은 효종이 북벌을 주장하며 군사력을 강화했던 중앙군이나 친위군이 아닌 베 15필을 조건으로 모집한 용병이었다. 또한 조선의 자의에 의한 출병이 아닌 청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파병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볼 때, 나선정벌은 우리에게 기억될만한 전투로 다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서양과 치른 최초의 전투에서 승리한 사실과 수석식 소총이라는 신형 무기를 확보한 점 그리고 조선과 군신관계를 유지하던 청에게 조선의 군사력의 우수성을 보여준 점과 러시아와 청, 조선의 국경지대의 긴장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는 사실 등은 소규모, 단기전, 강압에 의한 출병만으로 기억되는 나선정벌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제어 : 효종, 북벌, 군사력 강화, 나선정벌, 포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