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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사 사 / 기 타 군사연구 제129집 235 것으로 보아 효종이 주장한 북벌은 실질적인 청과의 전쟁이라기보다 자신의 취약 한 왕권을 강화시키는 명분에 지나지 않았나 생각된다. 다음으로 효종의 군사력 강화는 다양한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군사력 강화가 실제 전투를 담당하는 지방군이 아닌 중앙군이나 친위군 위주로 시행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삼남지방을 제외한 전국에 서 겸영장제를 시행한 점 역시 청의 감시를 벗어나 군사력을 강화하겠다는 의도 도 있었지만 당시 왕권강화를 위해 지방의 유력세력인 士族이나 土豪들을 견제하 기 위해 수령의 권한을 강화시켰다는 점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효종 이 청나라를 공격하겠다고 주장하면서 청나라의 파병요구에 조정의 신료나 비변 사와의 토의도 없이 독자적으로 파병을 승인하는 내용 등을 통해 유추해보면 효 종은 청과의 전쟁에 다소 회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100〜200명의 병력을 파병하는데 있어 기존에 실시했던 군사력이 강화된 군대(중앙군이나 친위군, 삼남지방의 지방군)와는 상관없는 함경북도 군사들을 대 상으로 베 15필을 조건으로 지원자를 모집했던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더 군다나 파병군이 출정한 이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함경도 지역의 군사력을 강화하자는 신하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실을 통해서도 효종의 군사력 강화 의도는 청나라의 공격에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전문화된 군사가 아닌 일반 농민들을 파병하였음에도, 나선정벌에 승리 할 수 있었던 요인은 함경도 지방의 강한 군사력을 들 수 있다. 함경도 지역은 건국 이후부터 임진왜란 발발 전까지 모두 131회에 달하는 여진의 침입을 받았 다. 62) 이에 조선은 여진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함경도 지역에 주변의 지형적인 요인을 고려하여 43개의 鎭堡를 비롯한 여러 가지 방어시설을 설치하여 여진의 공격을 둔화시켰다. 그리고 넓은 방어정면에 비해 부족한 병력을 보유했던 함경도 지역에서는 남방 지역에서 실시되던 自戰自守의 성격인 진관체제와는 달리, 유사시 인접 지역과 후방 지역의 병력까지 총동원하여 전투 초기에 전투력을 집중하는 制勝方略을 실시 하며 여진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였다. 특히 함경도 지역의 군사들은 남방 지역의 군사들보다 10배가 넘는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63) 62) 유봉영,「왕조실록에 나타난 이조전기의 야인」,『백산학보』14, 백산학회, 1973, 95~ 111쪽. 63)『중종실록』권98, 37년 5월 신축 ;『중종실록』권99, 37년 10월 갑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