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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북벌정책과 나선정벌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재검토 234 군사연구 제129집 초에 영고탑으로 복귀할 것을 지시하며 군관 1명을 회령으로 보내 계속해서 군량 을 실어오도록 지시하였다. 59) 하지만 영병장 신유는 귀국을 희망하는 병력들을 강제로 주둔시키면 사고가 날 수 있다며 청의 지시를 거절하였고, 이에 청군은 조선군의 복귀를 허락하였다. “만약 적을 다 무찌르지 못하여 다시금 교전하는 일이 있다면 비록 일국의 재 력을 탕진하여 군량을 실어오는 일이 있더라도 어찌 마다하겠소. 그러나 적을 이미 무찔렀는데 또 무슨 걱정이 있단 말이오. ... 더구나 지금은 장마철이라 회 령과 영고탑 사이의 많은 강물을 건너야하며 그러자니 쌀은 비를 맞아 쉽게 썩을 것이오.” 60) 한편 신유 장군은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 노획한 신무기를 입수하여 복귀하고 싶다는 의사를 청군 사령관에게 직접 전달하여 신형 무기인 燧石式 소총 1정을 입수하였다. 61) 조선군은 8월 4일 주둔지를 출발하여 귀국길에 올라 8월 13일에 영고탑에 도착하였고, 26일에는 두만강 북안에 도착, 8월 27일 회령에 도착함으로 써 2차 나선정벌은 종료되었다. Ⅴ. 맺 음 말 지금까지 효종대에 일어난 북벌정책과 군사력 강화, 그리고 1ㆍ2차 나선정벌을 살펴보았다. 먼저 효종대의 북벌정책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현존하는 사료는『악대설화』 가 유일하다. 하지만 이 사료는 전적으로 송시열에 의해 기록된 만큼 효종의 북 벌정책에 대한 진위여부를 판단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북 벌이라는 단어가『효종실록』이나『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점과 조선 을 왕래하던 청 사신에 의해 명의 잔존세력이 점차 약화되고 있음을 파악하였던 59) 박태근, 위의 책, 102쪽(북정록 6월 25일). 60) 박태근, 위의 책, 103쪽(북정록 6월 25일). 61) 박태근, 위의 책, 120쪽(북정록 7월 28일).;기존에 조선군이 사용하던 소총은 화승총 (火繩銃)으로 발사약에 점화하여 탄환을 발사하는 방식이었고 16세기 중반까지 사용 되었다. 반면에 수석식 소총은 부싯돌을 이용해서 작약에 점화하는 방식으로 16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중반까지 사용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