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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사 사 / 기 타 군사연구 제129집 227 17세기 중반 매년 반복되는 흉년과 자연재해로 인해 신하들의 祿俸을 감액하는 등 조선의 경제적인 상황은 여전히 취약했다. 지금까지 효종이 추진해 온 군사력 강화 부분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왕권과 연 결되는 중앙군에 해당되는 것으로, 실질적으로 외적과 전투를 하는 지방군의 강 화는 중점대상에서 다소 벗어나 있었다. 이는 효종이 실질적인 군사력 강화 보다 는 자신의 정통성 없는 왕권을 강화시키는데 주안점을 둔 것으로 이해된다. Ⅳ. 1ㆍ2차 나선정벌 러시아는 16세기 말엽부터 모피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우랄산맥을 넘어 동진정 책을 실시하였다. 35) 당시 러시아에 있어서 모피자원은 러시아 정부 1년 수입의 약 10%를 차지하는 중요한 자원이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1650년부터 흑룡강에 진입하여 원주민을 약탈하고 모피와 식량자원을 탈취하는데 집중하였다. 이에 청 나라는 흑룡강 남쪽의 영고탑에 정규군인 ‘滿洲八旗軍’을 출동시켜 러시아 군대의 동진정책을 막으려 하였지만 러시아의 총포무기 위력에 밀리어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패배하였다. 36) 또한 이 무렵 청나라의 주력은 남방에서 여전히 항거하던 南明(1644〜1662)을 제압하는데 투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37) 흑룡강 일대의 러시아 침입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이에 청나라는 병자호란 이후 정축약조의 5항에 근거하여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35) 역사적으로 러시아군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이반 4세(1533〜1584)의 팽창정책이 계기가 된 16세기 후반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가 군대다운 형태를 갖추게 된 시기는 표트르대제(1672〜1725) 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683년 자 신이 군대를 창설하여 집권하고, 전쟁수행에 적합하도록 발전시키는데 주력했다(이 한종,「러시아 군사사상의 역사적 조망」,『국방연구』35, 국방대학교 안보문제연구소, 1992). 36) 1652년 청나라와 러시아는 최초로 전투를 벌였다. 1,500명의 청군과 206명의 러시아 군이 전투를 벌였으나, 청나라는 화력의 부족과 무모한 생포작전으로 인해 676명의 전사자를 내며 패배하였다(박태근, 위의 논문, 3〜4쪽). 37) 당시 청은 흑룡강을 따라 만주를 압박하는 세력이 누구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하고 있었다(계승범, 위의 논문, 2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