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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북벌정책과 나선정벌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재검토 224 군사연구 제129집 서울에서 근무하도록 하며 근무기간 중에는 급료와 무기를 국가에서 지급해 주었 다. 23) 이러한 방식은 군사 1명당 3년 반 동안 2개월만 근무를 하면 되는 것이었 기 때문에 군사들의 입장에서는 기존에 合氷期(10월 초~익년 2월 말)에 2교대로 나뉘어 75일간 근무하는 방식보다 한결 수월한 軍役이었다. 또한 효종은 어영청 내에 別馬隊를 창설하기 위해 제주도에 있는 목마장의 충 실한 관리를 지시하고 제주도의 貢馬를 늘려 官馬를 대량으로 확보하였다. 주지 하다시피 조선의 군사는 크게 騎兵과 步兵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기마병이 주 력인 청에 대항하기 위해서 조선에서도 기병을 강화하고자 하였는데, 기병은 자신들이 戰場에서 직접 타고 전투를 해야 되는 戰馬와 짐을 싣고 전장까지 가 야되는 卜馬의 2마리 말을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선조 16년(1583)에 발발하였던 ‘尼湯介의 亂’이 종료된 이후 조정에서는 기병의 경비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전마를 혁파하고, 광해군대에는 복마마저 혁파 하였다. 24)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목장에서 기르던 말을 기병들에게 직접 나누어 주어 전마로 기르게 하거나 唐馬나 胡馬를 무역해서 군사들에게 지급해 주어야 했기 때문에 말의 확보는 당시 조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였다. 이어서 효종은 병조판서 박서의 주도로 국왕의 친위부대인 禁軍 600명을 전부 기병으로 전환시켰다. 금군은 기존에 629명이 편제되어 있었으나 어영청의 임무 를 겸직하는 자가 200여 명이 넘어 순수하게 금군 임무를 수행하는 자는 400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25) 따라서 효종은 금군의 강화를 위해 어영청 임무를 겸직하 는 자를 원래 임무로 돌려보내는 동시에 호조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왕 6년 4월에 는 금군의 인원을 1,000명으로 증가시켰다. 26) 다음으로 훈련대장 이완에 의해 중앙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훈련도감의 군 사력을 강화하였다. 23)『효종실록』권8, 3년 6월 기사. 24) 윤호량,「선조 16년(1583) ‘니탕개의 난’과 조선의 군사전략」, 고려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0, 36쪽. 25)『비변사등록』집6, 효종 3년 8월 28일. 26)『만기요람』「군정편」권2, 부용호영설치연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