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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사 사 / 기 타 군사연구 제129집 223 좌의정 이시백이 “산성의 성가퀴는 2,600군데로서 성가퀴를 지키는 군졸은 5만여 명을 써야 하는데, 현재 예속된 군병은 겨우 4만 명으로 모자라는 수가 1만 명입니다. 따라서 안동, 대구 등 鎭 의 군병 2,000명, 춘천 鎭 의 군병 2,500명, 광주 등 다섯 고을 의 군병 2,300명을 나누어서 산성에 예속시켰습니다. 그러나 병자년(1636) 이후 안 동과 대구는 길이 멀다는 이유로 충주, 청주 등의 鎭과 강원도의 군병을 남한산성 에 예속시키고 공주, 홍주(지금의 충주), 전주 등의 鎭과 연안, 백천의 군병을 강화 도에 예속시켰습니다. 또한 먼 지방의 군병은 반드시 제때에 산성으로 들어가 지키 지 못할 것이니, 경기의 군병으로 이속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 자 효종은 “남한산성의 성가퀴를 지키는 군병을 충청도의 군사로 바꾸어 예속시키 는 것이 온당한지의 여부를 총융사와 상의하여 처리하라.”고 지시하였다. 20) 이어서 효종 3년(1652) 9월에는 남한산성의 방비 강화를 위하여 수어청 군병을 砲手 중심의 군사로 대체하였고, 동왕 6년(1655) 1월에는 군량확보를 위해 청천강 이북의 稅米(조세로 바치던 쌀) 6천석과 충주의 관곡을 남한산성 내에 저장시키 도록 하였다. 또한 남한산성 근방에 屯田을 개설하거나 軍需米를 준비하는 등 자 체적으로 군량미를 확보하려고 노력하였으나 항시 부족하여 영세성을 면하지 못 하였다. 21) 수어사 이시방이 “남한산성 안에 군량을 장만하여 두려 하나 달리 처리할 방책 이 없으니, 강가에 있는 각 고을의 세미 5, 6천석을 산성에 운반하여 급할 때에 군 사들의 먹을거리로 삼아야 합니다.”라고 하니, 효종은 “그 수량이 1만여 석에 이르 더라도 모두 남한상성에 날라 두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22) 수어청의 강화와 함께 효종은 어영청도 강화하였다. 어영청은 후금에 대한 강 경책을 표방한 인조가 후금이 침입하면 직접 평양까지 나아가 親征하기 위하여 편성한 군대로, 훈련도감과 함께 수도방위는 물론 왕권수호를 전담하는 중앙군의 일원이었다. 어영청의 강화는 어영대장 이완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우선 어영청의 편제를 확대하여 훈련도감의 편제와 같은 규모로 증가시켰다. 즉 인원을 7,000명 에서 21,000명으로 대폭 늘리고 1,000명씩 모두 21번으로 나누어 2개월씩 교대로 20)『효종실록』권6, 2년 6월 무신. 21) 둔전의 경우 황무지의 개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비옥한 토지 일부를 제외하면 생산성이 낮은 것이 보통이었다(이경식,「16세기 둔전경영의 변 동」,『한국사연구』24, 한국사연구회, 1979, 194쪽). 22)『효종실록』권14, 6년 1월 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