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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북벌정책과 나선정벌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재검토 220 군사연구 제129집 효종은 청이 명을 멸망시킨 이후 군사적인 문제 보다는 內治에 주력할 것이라 고 판단하고 漢族이 가지고 있던 청에 대한 민족적 반감을 이용해 이들과 함께 청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다음의 글은 효종이 죽기 3개월 전인 효종 10년(1659) 3월 11일 효종과 宋時烈(1607∼1689)이 독대하였을 때 나눈 비밀내용으로, 청에서 발생한 ‘三藩의 亂’ 13) 을 계기로 북벌론이 조정에 다시 등장한 현종ㆍ숙종대에 세상에 알려진 幄對說話 14)에 나오는 효종의 말이다. “저 오랑캐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 ... 여러 신하들이 내가 兵事 를 다스리지 말았 으면 하는 것 같은데, 내가 듣지 않는 것은 天時와 人事가 언제 좋은 기회가 올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예 砲兵 10만 명을 양성한 후 자식같이 그들을 사랑 하고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로 만든 후에 저들의 틈이 있기를 기다려 바로 關外로 나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중원의 의로운 선비들과 오랑캐가 어찌 호응 하지 않겠는가.” 15) 효종은 騎馬兵이 주력인 청에 대항하고자 10만 명의 병력을 양성하고, 이 인원 들로 하여금 요동을 공격하면 병자호란 당시 사로잡혀 간 조선인 포로와 한족의 봉기로 청에게 복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효종의 이러한 생각은 8년간 인질 생활을 하며 여러 차례 전투에 참여하면서 청에 대한 군사, 지형, 도로 등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갖추었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16) 그러나 효종은 자신이 아니면 북벌을 추진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3) ‘삼번의 난’은 오삼계⋅상가희⋅경중명 등 三藩의 왕이 청나라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 란으로, 명나라가 멸망했을 때 항복한 漢人들을 규합하여 청에 대항한 사건이다. 1673년에 시작된 ‘삼번의 난’은 한때 양자강 일대까지 세력이 확대되었으나 1681년 청에 의해 평정되었고 난이 종료된 이후 중국에 대한 청의 지배권은 한층 강화되었다. ‘삼번의 난’과 관련된 보다 자세한 내용은 홍종필,「삼번난을 전후한 현종⋅숙종년간 의 북벌론-특히 유림과 윤휴를 중심으로」,『사학연구』27, 한국사학회, 1977 참고. 14) 악대설화는 효종과 송시열이 독대하여 國政을 논한 글이다. 악대라는 말은 ‘송나라 효종이 장준과 장식에게 국정을 위임하고서 장식을 불러 토론할 적에 밖에 한 사람 도 없이 유악(帷幄)에서 대화하였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명명한 것이다. 악대설화의 내용은 대외적으로 청나라에 대한 복수와 그에 따른 마음가짐, 대내적으로 李珥 등 의 문묘종사, 강빈옥사와 김홍욱의 처분 문제 등 당시 첨예하게 대두된 국정 전반에 대해 토론한 것이다(지두환,『효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1, 129쪽). 15)『송서습유』권7,「잡저」악대설화.;악대설화는 전적으로 송시열에 의해 기록된 글이 기 때문에 효종과 송시열이 독대할 당시의 내용을 정확하게 신뢰할 수 없다. 하지만 독대의 내용을 기록한 현존하는 유일의 책이기 때문에 중요한 사료라고 생각한다. 16) 이경찬, 위의 논문, 207~20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