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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연구 22 군사연구 제129집 기록되어 있다. 42) 이러한 정황에 비추어 볼 때, 「만고의사 안중근전」과 혈서 엽 서에 기록된 1909년 2월 7일이 음력이라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이 날짜를 양 력으로 환산하면 위 일제 기록상의 일자에 비해 4일이 앞선 2월 26일이 된다. 그 러므로 현재로서는 이 날을 동의단지회가 결성된 일자로 비정하는 것이 가장 합 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43) 3. 결성장소 동의단지회가 연해주 남부 우수리구역의 연추(煙秋)에서 결성된 사실은 분명하 다. 위에서 보듯이 결성 직후에 작성된 일제 정보기록에서도 그 장소를 연추로 파악하였고, 안중근과 계봉우도 역시 연추에서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였다고 기술 하였다. 그런데, 연추는 연추강을 따라 한인 마을들이 남북으로 널리 형성되어 있던 일 정 영역을 가리키는 일종의 지방 이름이다. 구체적으로 연추는 북쪽 중국경 방면 에서부터 남쪽으로 상, 중, 하별리(下別理) 순으로 세 개의 마을이 연추강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상, 중, 하별리는 경우에 따라서 상, 중, 하연추로 불 리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동의단지회가 결성된 장소는 구체적으로 어디일까? 그 장소를 명확 히 비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그 장소를 알려주는 단서가 하얼빈 의거 후 신문․공판 과정에서 안중근이 남긴 진술뿐이다. 안중근의 신문․공판 진술은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동지․단체 보호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그 내 용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 다음으로, 연추 현지조사를 체계적으로 진행하기 42) 暴徒에 關한 編冊 , 「警秘親 제22호」(1909. 3. 12);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 자료13 , 803쪽. 43) 그런데 혈서 엽서의 좌측에는 순한문으로 ‘一千九百九年 一(二)月 五日’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점이 혼란스럽다. 이 날짜가 양력, 러시아력(아력)으로 대비시켜도 모두 맞지 않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오기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참고로 엽서의 좌우측 일자를 음력, 양 력, 아력 등으로 대비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아력 1월 5일; 양 1월 18일; 음 1월 8일 아력 2월 5일; 양 2월 18일; 음 1월 28일, 음력 윤2월 7일; 양 3월 28일; 아 3월 15일 음력 2월 7일; 양 2월 26일; 아 2월 13일 양력 2월 7일; 음 1월 17일; 아 1월 2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