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page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의 대게릴라전 연구 192 군사연구 제129집 바탕으로 한 전략촌 계획(Stategic Hamlet Program)을 추진하였다. 전략촌 계획 은 베트콩과 주민을 분리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여 주민을 이주시킨 다는 계획이었다. 14) 이 방식은 영국이 말라야에서 게릴라들을 고립화시키기 위해 서 사용한 것이었다. 미군은 남베트남정부를 지원하여 전략촌 계획을 바탕으로 베트콩을 고립시키고자 했다. 남베트남정부는 1962년 2월부터 공식적으로 전략촌 계획을 실행했다. 정부는 기존의 집단 이주촌 설립 계획 15) 과 달리 주민들의 무조건적인 이주를 강요하지 않았고, 기존의 마을을 개조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러한 방식은 비용과 정부 개입 부담을 줄였고, 주민들의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남베트남 정부의 전략 촌 계획은 영국의 작전을 통해 기존의 실패한 계획을 개선할 수 있는 효과적인 개념이었다. 하지만, 남베트남 정부는 이 계획의 실행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 러냈다. 특히, 전략촌 건설에 있어서 나타난 남베트남 정부의 실적위주 급속추진 은 평정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하는 결과를 야기했다. 16) 전략촌 계획은 결국 계획의 추진에 있어서 본질적인 목적이었던 게릴라와 주민의 분리에 성공하 지 못함으로써 1964년 2월부터 중지되었다. 미군의 대게릴라전은 궁극적으로 게릴라 부대를 격멸하는 것이 목표이었다. 하 지만, 이것이 게릴라전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웨스트모랜드 장군의 전장판단과 대민관계중시, 그리고 미군의 심리전 노력은 게 릴라전의 본질을 바탕으로 한 미군의 대게릴라전 수행방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14) 전략촌 계획은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는 게릴라와 마을의 연계를 끊어서 게릴라를 고립시키는 것, 둘째로는 마을 내의 게릴라 기지와 시설을 없애버리는 것, 셋째로는 주민들이 게릴라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기구를 조직하는 것 이었다.(Anthony James Joes, The War for South Vietnam(Westport:Praeser, 2001), pp.63~64.) 15) 응오딘지엠 정권은 1957년 “농촌개발센터(agroville)”라고 명명한 집단 이주촌 건설을 추 진하였다. 이는 주민의 노동력 동원을 통한 무조건적인 이주정책으로 주민들의 반발을 샀고, 주민의 기호와는 맞지 않는 마을구조의 문제점이 나타났으며, 막대한 이주비용문제 때문에 효과적인 마을건설이 되지 않은 문제가 발생하여 실패했다. 1961년에는 22개의 이주촌만이 버려진 채로 남았다.(유제현,『월남전쟁』, p.127.) 16) 영국이 3년 동안 말라야에서 500개의 전략촌을 구축하였던 반면, 남베트남 정부는 2년 동안 12,000개의 전략촌을 구축했다. 부패한 정권에서 추진한 실적위주의 전략촌 건설은 베트콩의 마을진입을 차단하지 못했고, 마을에 대한 적절한 지원이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마을의 방어체계 구축 또한 효과적으로 실행하지 못했다.(Anthony James Joes, 앞의 책, pp.64~6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