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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연구 20 군사연구 제129집 끊어, 그 피로써 태극기 앞면에 글자 넉자를 크게 쓰니 대한독립(大韓獨立)이었다. 쓰기를 마치고 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세 번 부른 다음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흩 어졌다. 그 뒤에 각처로 왕래하며 교육에 힘쓰고 국민의 뜻을 단합하고 신문을 구 독하는 것으로써 일을 삼았다. 33) 안중근이 남긴 위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곧 연해주 한인사회 순방에서 돌아온 직후에 자신을 포함하여 12명의 동지들이 독립운동에 심신을 바칠 것을 맹세하고 그 빙거(憑據)로 왼손 무명지 한 마디를 자르고 태극기 전면에다 혈서로 ‘대한독 립(大韓獨立)’ 네 자를 썼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안중근이 주도하여 결성한 동의 단지회는 전년 의병단체로 결성되었던 동의회에 연원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맥 락에 대해서는 계봉우가 「만고의사 안중근전」에서 다음과 같이 밝혀 놓았다. 공이 북간도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삼위 지방으로 행하여 갈 제 명월노화( 明 月蘆花)에 남방으로 가려는 외기러기 그 짝을 부르듯 동의회를 모집하여 영산에서 한번 싸움하여 왜놈의 간담을 얼마큼 서늘하게 하였으나 시기가 이(利)치 못함으로 연추에 물러와 다시 거사하기를 도모할 새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자는 친구 열 한 사람으로 더불어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설립하고 각기 무명지를 끊어 맹세한 후에 그 피로써 태극기에 대한독립 네 글자를 썼더라. 34) 이처럼 계봉우는 단지동맹한 결사의 명칭을 동의단지회로 기록하여, 동의단지 회가 동의회에서 연원하던 정황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이것은 동의단지회가 동의회를 계승한 의병 결사였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2. 동의단지회의 결성 안중근이 동의단지회를 결성한 일자를 명확하게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얼빈의거 후 안중근은 신문․공판 과정에서 일제로 하여금 혼선을 야기하고 동 지들을 보호할 의도에서 결성시기에 대해 수차에 걸쳐 상이한 진술을 하였다. 1909년 11월 4일 구연효웅(溝淵孝雄) 검찰관의 신문에 대하여 안중근은 1909년 봄에 혼자 단지했다고 진술하였다. 35) 그후 11월 24일과 27일의 경(境) 경시의 신문 33) 「안응칠역사」; 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 169쪽. 34) 계봉우, 「만고의사 안중근전」9, 권업신문 1914년 8월 23일자; 윤병석 역편, 안중근전 기전집 , 525쪽. 35)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6 , 5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