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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29집 19 위의 기록에 따르면, 안중근은 두 명의 동지와 함께 1908년 11월 2일(음, 10. 9) 연추 근거지를 떠나 각지 한인사회 순방에 나섰다. 29) 그는 수청의 한인사회를 돌 아본 뒤 하바로프스크로 올라갔으며, 이곳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북상하여 흑룡강 변의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까지 역방하였다. 30) 결국 그는 3개월 동안에 연해주 외곽에 형성된 각지 한인사회를 널리 여행했던 것이다. 대규모 국내진공작전이 별다른 성과없이 끝난 뒤, 한인사회에서 의병의 열기가 급격히 식어가고 위축되던 상황을 반전시켜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의병 유세를 결행한 셈이었다. 한인사회를 역방(歷訪)하면서 그는 교육에 힘쓰기도 하 고, 혹은 단체를 조직하는 데 진력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31) 동의단지회는 이처럼 의병투쟁의 여건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안중근이 의병결 사인 동의회의 취지와 정신을 계승하여 인심단합을 통해 조국독립과 동양평화에 더욱 매진할 목적으로 결성한 단체였다. 32) 안중근은 자서전에서 동의단지회를 결성하던 정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이듬해 기유년 연추 방면으로 돌아와 동지 12인과 같이 상의하되 우리들이 전후 에 전혀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요, 뿐만 아 니라, 만일 특별한 단체가 없으면 어떤 일이고 간에 목적을 달성하기가 어려울 것 인즉, 오늘 우리들은 손가락을 끊어 맹세를 같이 지어 증거를 보인 다음에,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기어이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는 것이 어 떻소 하자 모두가 그대로 따르겠다 하여, 마침내 열 두 사람이 각각 왼편 손 약지를 29) 안중근의 행적과 관련되어 위 기간에 일시 국내로 들어와 체류했을 개연성도 배제 할 수 없다. 이 경우, 국내 항일 인사들과 일정한 제휴나 교유가 있었을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하얼빈 의거와 관련되어 특히 주목된다. 안중근이 수원에서 1908년 10월 1일(음) 진남포의 빌렘(洪錫九) 신부에게 보냈다는 엽서(안의사 기념관 소장)가 그러한 정황을 알려준다. 이 문제는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겨 둔다. 엽서의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화급한 일입니다. 목하 수원에 머물고 있으며 앞으로 서울로 나갈려고 계획하고 있습 니다. 친지제솔 등에게 이뜻을 전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일이 있으면 글을 올리겠습니다. 안심하기를 천만복망 합니다.(有火 急用事 目下水原留臨 前途漢 城所過之地 向發爲計 親知諸率等 下傳于此指 幸甚伏望 有地發後上書 諒如安心之地 千萬伏望) 30) 「안응칠역사」에는 이 기간 여정에 대해 연추에서 하바로프스크로 북상하여 다시 기선을 타고 흑룡강 상류 수천 리를 여행한 뒤 수청지방으로 내려왔으며, 1909년 음력 1월에 연 추로 귀환한 것으로 밝혀 놓았다. 이 여정은 위의 계봉우 기록과 순방 대상지는 동일하 지만 순서상 차이가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어느 쪽이 옳은지 확단하기 어렵다. 31) 「안응칠역사」; 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 168쪽. 32) 윤병석, 「안중근의 ‘同義斷指會’의 補遺」,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2, 독립기념관 한국독립 운동사연구소, 2009, 102~10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