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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연구 18 군사연구 제129집 위에서 안중근은 극심한 고초 속에서도 생환할 수 있었던 것은 ‘천명’ 때문이었 다고 회고하였다. 연추 귀환 후 친구들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국내진공 한 달 반 동안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영산전투 참패 후 안중근이 마음 속에서 “옛날 미국 독립의 주인공인 워싱턴이 7, 8년 동안 풍진 속에서 그 많은 곤란과 고초를 어찌 능히 참고 견디었던고. 참으로 만고에 둘도 없는 영걸이로다. 내가 만일 뒷날에 일을 성취하면 반드시 미국으로 가서, 특히 워싱턴을 위해서 추상하고 숭배하고 기념하며 뜻을 같이 하리라.”라고 하여 모진 고통을 이겨내고 미국 독립의 영웅이 된 워싱턴을 뼈저리게 경모하였던 사실도 자신이 겪었던 엄 청난 고통을 가탁(假託)한 소이라 할 것이다. Ⅳ. 안중근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결성 1. 동의회와 동의단지회의 관계 안중근이 의병에 투신한 뒤 하얼빈의거를 결행하기까지 중간 도정(道程)에 동의 단지회가 위치해 있다. 곧 동의단지회는 안중근이 결행한 의병의 항일전과 하얼빈 의거 양자를 연결시켜주는 전도체였으며, 동시에 소수 정예의 동지들로만 구성되어 동의회의 설립목적과 투쟁목표를 더욱 한정시킨 동의회의 후신과도 같은 결사였다. 1908년 7월 국내진공작전을 결행한 뒤 함북 회령의 영산전투에서 패하고 그해 8월 말 혹은 9월 초 연추로 귀환한 안중근은 연해주 각지의 한인사회를 순방하였 다. 영산전투 패산 후 안중근이 연해주 한인사회를 순방한 내역에 대해 계봉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공의 제일 장쾌한 여행은 우수리 등지와 북만주 일대에 시찰한 것이니 일찍 회 령군 영산( 靈山 ) 전쟁에 성공치 못함을 크게 분하여 단군 4천 2백 4십 1년 시월 초 아흐렛날에 동지 두 사람을 데리고 해삼위를 들려 수청 등지를 지나 서북으로 화 발포(花發浦)(하바로프스크-필자주) 지방을 들려 살피고 다시 북만주의 3천 리 약수 (흑룡강)을 건너 살마리아(사만리, 블라고슬로벤노예-필자주)까지 두루 편답(遍踏) 하고 돌아오니 그동안 일자는 석달이 넘고 리수는 수만여 리가 되었더라. 28) 28) 계봉우, 「만고의사 안중근전」6, 권업신문 1914년 8월 2일자; 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 전집 , 51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