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page

독도의 실효적 지배권 운영과정과 국토안보의 방향 162 군사연구 제129집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전승국의 자격으로 참여하고자 했으나, 영국과 일본의 반대 의견을 받아들인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43) 한국 정부는 강화조약에서 한국이 배제된 것에 항의하면서, 철폐될 맥아더 라인을 대신할 한일 간의 새로운 어업선을 다시 요구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 여지지 않았다. 44) 대일 강화조약에서 배제된 한국 정부는 1952년 4월 강화조 약 발효 이전에 맥아더라인 문제 등 한일 간의 각종 현안들을 타결하기 위해 미국의 주선에 따라 일본과 직접 협상을 시도했다. 그 결과 1951년 10월 20일 제1차 한일회담의 예비회담이 도쿄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14년 동안 계속될 한일회담이 드디어 막을 올린 것이다. 2. 대일강화조약과 이승만라인 일본 어선의 맥아더라인 침범에 대하여 한국 정부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엄정한 단속을 계속 요구했다. 그러나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단속보다는 한일 간의 어업협상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했다. 맥아더라인의 철폐가 현실 화되면서 한일 간 어업협상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에 한국 정부의 상 공부 수산국에서는 맥아더라인 철폐와 일본과의 어업협상에 대비하여 낙후된 한국 어업을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상공부 수산국이 마 련한 방안은 한국 주변의 주요 어장을 한국의 ‘어업관할수역’으로 선포하여 일본 어선의 남획을 규제하는 것이었다. ‘어업관할수역’은 과거 일제가 1929년 12월 조선총독부령 제 109호로서 제정한 ‘트롤어업금지구역’을 근거로 만들어 졌다. 상공부 수산국은 식민지 시기에 일제가 스스로 만든 기준으로 ‘어업 관할수역’을 설정한다면 일본이 쉽게 반발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45) 상공부의 ‘어업관할수역’ 안은 외무부와 협의를 거치면서 독도를 포함하는 ‘어업보호수역’안으로 확대되었다. 당시 일본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계속 주장하고 있었지만, 독도가 맥아더라인의 밖, 즉 일본 어선의 어로 수역 밖에 43) 이종원,「한일회담의 국제정치적 배경」『한일협정을 다시 본다』(아세아문화사, 1995), 28~32쪽. 44)《조선일보》1951년 7월 23일. 45) 지철근, 앞의 책, 109~11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