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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29집 161 있는 권한을 한국 정부에게 부여해줄 것을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맥아더라인을 침범한 일본 어선을 나포하지 말고 통고만 해줄 것을 재차 강조했다. 반면 일본 정부는 1949년 6월 맥아더라인 을 더욱 확장해줄 것을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맥아더 라인을 한국의 경제와 안보상 중요한 생명선으로 간주하여 확장에 반대했고, 한국 국회는 6월 13일 맥아더라인의 확장 반대와 일본 어선의 맥아더라인 침범을 규탄하는 긴급동의를 채택했다. 한국 각지에서는 일본 어선의 맥아더 라인 침범을 규탄하는 궐기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결국 1949년 9월 19일 맥아더 라인이 다시 한번 확장 되었지만, 한국과 인접한 수역의 맥아더라인에는 변동이 없었다. 한국과 인접한 수역의 맥아더라인에는 변동이 없었으나 일본 어선의 맥아 더라인 침입은 계속되었다. 이에 한국 해군은 1949년 말부터 맥아더라인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들을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허가 없이 나포하기 시작했다. 특히 1950년 1월에만 제주도 부근에서 일본 어선 5척을 한꺼번에 나포하는 등 총 11척의 일본 어선을 나포했다. 41)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1949년 12월 14일과 1950년 1월 20일 두 차례에 걸쳐 한국 해군의 일본어선 나포에 대해 한국 정부에 항의했다. 하지만 한국 해군이 항의를 무시하고 1월 26일 다시 3척의 일본 어 선을 나포하자,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1월 27일 아침 미국 해군에게 구축함을 동원하여 공해상의 일본 어선을 방해하는 모든 한국 해군 선박들을 나포하도록 지시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무력시위와 함께, 주한미대사관 역시 한국 정 부에 강한 압력을 넣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이에 굴복하여 1월 27일 정오 한국 해군의 일본 어선 나포를 중지시켰다. 그리고 연합군 최고사령관에게 나 포된 일본 어선의 송환을 약속하고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항의에 대한 답변이 지연된 것을 사과했다. 42) 한국전쟁 이후 일본 어선의 맥아더라인 침범은 더욱 빈번해졌고, 맥아더라인의 존재 의미는 점차 퇴색되었다. 1951년 9월 8일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됨으 로써 일본의 주권 회복과 함께 맥아더라인의 철폐가 기정사실화되었고, 실제 로 강화조약 발효 3일 전인 1952년 4월 25일 맥아더라인은 철폐되었다. 41) 《서울신문》 1950년 1월 27일. 42) 오제연, 앞의 글, 1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