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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의 실효적 지배권 운영과정과 국토안보의 방향 154 군사연구 제129집 ‘芋陵’, ‘蔚陵’, ‘鬱陵’, ‘武陵’, ‘茂陵’,‘于山’. ‘芋山’ 등의 명칭이 자주 언급될 것이 다. 즉 이는 옛 문헌에 나타나는 울릉도․독도의 명칭임을 알 수 있다. 독도가 우리나라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512년이다.『삼국사기』권 4 신라 본기(新羅本紀) 4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13년과 또한『삼국사기』열전의 이사 부(異斯夫)편에 의하면 이사부가 울릉도와 부속도서를 점령한 기록이 보인다. 15)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지증왕 대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우산국 관련 역사적 기록이 더욱 빈번해지고 있다.『고려사』에 의하면 고려시기에는 우산국에 관리를 파 견하고 농기(農器)를 지급하기도 하였다.16) 그러나 여진족의 침략을 받은 우 산국은 급격히 쇠망하였고, 12세기 중엽에 들어와서야 다시 고려사에 그 지 명이 나타나게 된다. 12세기 중엽 이후에는 내륙관원을 파견하였고, 울릉도를 울진현의 관할로 편입하였다. 17)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울릉도 및 독도에 대한 정책은 초기에 ‘공도정책(空島 政策)’으로 나타난다. 조선 태종은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1403년 공도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공도정책은 세종 때 더욱 강화되었고, 울릉도와 독도는 점차 잊혀져 가게 되었다. 18) 한편 일본에서는 세종 12년(1488년)에 울릉도의 주민을 귀환하고 이를 공 도로 비워두자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어민들이 와서 어로와 벌채행위를 하게 되었으며 울릉도를 ‘이소다케시마’(磯竹島) 또는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르고 15) 十三年 夏六月 于山國歸服 歲以土宜爲貢 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 或名鬱陵島 地方一百里 恃嶮不服 伊湌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 謂 “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船抵其國海岸 誑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踏殺之” 國人恐懼 則降. 異斯夫 或云苔 宗 姓金氏 奈勿王四世孫 智度路王時 爲沿邊官 襲居道權謀 以馬戱誤加耶或云加羅國取之 至十三年壬辰 爲阿瑟羅州軍主 謀幷于山國 謂其國人愚悍 難以威降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 子 分載戰舡 抵其國海岸 詐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 踏殺之” 其人恐懼則降 眞興王在位 十一年 大寶元年 百濟拔高句麗道薩城 高句麗陷百濟金峴城 王乘兩國兵疲 命異斯夫 出兵擊 之 取二城增築 留甲士戍之 時高句麗遣兵來攻金峴城 不克而還 異斯夫追擊之大勝 16)『高麗史』世家 현종 9년 11월 丙寅. 17) 송병기,「고려 중ㆍ후기, 조선초기의 울릉도 경영:조선초기 지리지의 우산ㆍ울릉도기사 검토」ㆍ독도학회 편,『독도연구총서 10:한국의 독도영유권 연구사』(독도연구보전학회, 2003), 106~107쪽. 18) 송병기, 위의 글, 113쪽. ..